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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변하지 않는 `늑대들의 땅`…유럽은 다시 분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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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정학의 권위자로 국내에서 피터 자이한의 인기가 뜨겁지만, 그가 있기 전에 조지 프리드먼이 있었다. 자이한이 속해 있던 민간 정보회사 스트랫포의 회장을 거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프리드먼은 일찌감치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렸다. 옛소련 점령하 헝가리를 탈출한 유대인으로 미국 국방부 싱크탱크 ONA 등을 거친 그는 태생부터 남다른 국제정세 분석가다. 10년 전 '100년 후'에서 과거 500년간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다면 앞으로 500년을 지배할 국가는 미국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바 있다. 프리드먼이 2015년 펴낸 책이 뒤늦게 한국에 상륙했다. "사람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듣지 않고, 그들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위에 있는 힘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이 정확한 정세를 예측한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유럽의 위기를 말한다. 친절하게 바뀐 한국어 제목과 달리 원제는 '발화점(Flash Points)'이다. 바로 늑대들의 땅인 유럽이 과거로 회귀해 다시 분열하는 순간을 뜻한다.

"1949년 8월 13일 밤, 우리 가족은 다뉴브강의 헝거리 쪽 강기슭에서 고무보트에 올랐다."

책 1부는 나치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저자의 아버지 삶을 묘사한다. 나치의 압제에서 살아남자마자 옛소련의 폭정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은 "나치든 공산주의자든, 당신과 당신 가족을 죽여야 할 만큼 깊은 신념을 지닌 그 어떤 이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실로 지금의 유럽은 1945년 이후에 탄생했다. 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육에 가까운 전쟁으로 31년을 보낸 유럽인들은 다시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유럽연합을 구축했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해 프리드먼은 비관적이다. 갈등과 전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저자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은 통합이 불가능한 지형임을 논증한다. 바다와 해협, 산맥과 계곡이 있는 잘게 쪼개진 대륙이라는 지리적 여건은 한 나라가 정복하거나 통합하는 게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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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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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번영을 위해 유럽연합이 창설됐지만, 지금 이들은 경제적으로 큰 시련에 봉착했다. 여기서 나올 질문은 "번영이 사라지면, 또는 일부 국가들에서 번영이 사라지면 평화는 어떻게 될까"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1945년부터 1991년까지 냉전 시대의 평화는 유럽인에 의한 것이 아닌 미국과 옛소련이 강제한 평화였다.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평화는 이례적인 경제적 풍요와 독일이 통일에 골몰하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그의 부친은 "유럽은 늑대와 늑대가 잡아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유럽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유럽은 점증하는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 정서를 퍼뜨리며 분열하고 있다. 독일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러시아가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위기는 증폭되고 있다. 결정적으로 러시아와 터키가 충돌하고 있는 캅카스 지역이 있다. 서방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변방에서 양측 모두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게다가 작년 말 미군이 시리아 북부에서 철수한 뒤, 터키 영내에 거주하는 쿠르드족 7500만명은 공격을 받고 있다. 마지막 위험지대는 영불해협이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는 아니지만 미국의 지원에 힘입는다면 자신의 몸집보다 큰 타격을 날릴 수 있다.

또 다른 세계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프리드먼은 유럽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먼저 유럽연합은 전체를 대변하려는 지도자가 아닌, 각자의 이익을 다투는 지도자들의 경연장이 되고 있다. 대중 사이에서도 유럽연합에 대한 반감도 높아지고 있다. 지중해는 오래된 화약고였다. 지중해를 통해 난민이 대거 밀려들어오면서 유럽연합이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를 던졌다. 현재 이들에게는 난민 유입을 막을 어떤 합동 군대도 없고, 어떤 합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2015년 11월 파리에서 IS의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 프랑스가 처음 보인 반응은 국경 전면 폐쇄였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이어 국경을 폐쇄했다. 이처럼 각 민족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자유로운 이동을 막게 된다면 유럽연합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밀려나고 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스스로를 유럽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하는 프리드먼이 정치사상, 역사, 인문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유럽의 미래를 예측하는 이 책은 가히 유럽 국제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한국 독자를 위해 쓴 특별 서문도 실렸다. 그에 따르면 무역 문제와 해상권 문제에서 얽힌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중국에 유리한 협상 조건이 된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선택지를 갖고 있으며, 미국이 철수하면 중국은 한국을 자기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런 연유에서 프리드먼은 미국이 철수하는 경우를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 지속을 바라기에 미국의 국익을 보장하는 한국과의 공고한 관계가 필요할 것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북한과의 문제에서 한국은 반드시 미국과 공조해야 한다"면서 "한국에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잘 정리하는 일이다. 경제적 관계가 지정학적 관계를 약화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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