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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은밀하고 교묘하게…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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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리처드 해리슨의 `극지 방위각 투영법`은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지도다. 요제프 괴벨스는 이 지도를 "미국 세계 정복 야심의 증거"라고 지적했다. [사진 제공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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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세계의 인정을 받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 '기생충'만 보더라도 수개월 전 이미 최고 권위 영화제 프랑스 칸에서 대상을 안았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최근 미국 아카데미 후보에 선정되자 칸 최고 영예를 안았을 때보다 한반도는 더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우리에게 세계화란 미국의 인정을 받는 것과 동일시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다. 세계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을 자임하는 미국이 어떻게 한편으로는 제국으로서 영향력을 미치는지 살펴봤다. 노스웨스턴대 역사학과 부교수로서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해 강의하는 저자 대니얼 임머바르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 제국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무시해왔다는 점"이라며 "1898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하면 제국주의 역사의 상당 부분은 은밀히 전개돼왔다"고 주장한다.

서부를 개척하며 원주민을 몰아냈던 미국이 오직 평화를 사랑한단 이유로 제국주의를 배척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단 대영제국 식민지로 출발한 이 나라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고 저자는 짚는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5)으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은 유명한 반제국주의자였다. 당시 미국이 필리핀에서 벌이던 전쟁을 비판했다. 이러한 반제국주의는 일부 감수성 예민한 작가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1900년 민주당은 "어떤 국가도 공화국이면서 제국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제국주의 목소리가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미국의 욕망을 사그라뜨리진 못했다. 1941년 포천지에 처음 게재된 '극지 방위각 투영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 지도 제작의 최고 권위자인 리처드 해리슨이 완성한 이 지도는 세계의 중심에 자국을 두려는 미국인의 본능이 잘 드러난다. 북극 주변에 모여 있는 대륙을 가운데에 놓고 그린 이 지도엔 북미가 유럽의 독일 제국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냈다. 요제프 괴벨스가 이 지도를 기자들 눈앞에서 흔들며 '미국 세계 정복 야심의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정도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이 지도를 보며 '모든 방향이 마침내 서로 만드는 둥근 지구'로 세계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적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이제 새롭게 열리는 시대의 이미지는 공 모양의 '글로벌' 지구, 완벽한 구체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저자는 "매클리시가 선택한 '글로벌'이라는 단어는 새로웠다"며 글로벌리스트, 글로벌리즘을 비롯한 신조어가 탄생한 과정을 풀이한다. 미국의 해외 전략 기조가 '정복'에서 '글로벌리즘(세계통합주의)'이라는 레토릭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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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국은 다른 나라에 깃발을 꽂지 않고도 어떻게 각국의 자발적 협조를 얻어낼까. 주요 원동력 중 하나는 '표준화'다. 표준화의 아버지인 허버트 후버는 경제 문제의 원인이 물건의 비효율성에서 나온다고 믿는 이였다. 표준화와 간소화를 번영의 핵심이라고 봤다. 상무장관이 된 그가 이뤄낸 가장 위대한 업적은 '나사산'(나사의 솟아오른 부분)의 표준화다. 모든 사회는 초기에 호환되지 않는 나사산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후버는 "(노동자가) 너트를 끼워 넣기 전에 동일 제조업체의 볼트를 찾아야 했는데 지름이 서로 다른 100여 개 가운데 찾아야 했다"며 "이제 0.5인치 너트는 모든 0.5인치 볼트에 끼울 수 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나사산을 비롯한 미국의 스탠더드가 순식간에 세계로 확장됐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기준을 '표준'이라고 관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미국식 표준이 퍼지게 된 건 미국의 압도적 물자 덕분이다. 2차 세계대전 말엽 미국은 8만4000여 대의 탱크, 220만대의 트럭, 410억발의 소형 탄약을 생산했다. 히틀러에게 맞선 최전선은 유럽에 있었지만 무기는 온통 미국산이었다. 호주는 한창때 국민소득 15%를 맥아더 조달 주문에 의존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화됐다.

일련의 '교묘한 세계 정복 전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영토'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흔히 떠올리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만 이 나라의 영토라고 보는 시각은 미국의 전체상을 그리는 데 오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 요지에 미연방 자치령을 점처럼 흩어놓고, 미군기지를 뿌려둬 이른바 '점묘주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북리뷰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 선정을 비롯해 각계에서 호평받은 책이다. 다방면에서 미국과의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우리 정부 정책의 현실성과 타당성을 점검하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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