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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공장에서 만든 육개장을 낼 순 없지 그들에게 내민다, 묵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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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육개장 편

서울 원효로 한아름전통육개장

스마트폰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가상공간 속에 영원히 남은 이름들은 예고 없이 가슴을 때린다. 지우지 않은 이름 두 개. 스마트폰 메신저를 켜면 그들 이름에 다른 사람 얼굴이 뜬다. 그 번호로 다른 사람이 휴대전화를 맞춘 듯싶다. 꽃다운 나이라는 말조차도 아까운 젊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멍한 표정으로 맞절을 하고 테이블에 앉으면 비쩍 말라버린 안주 몇 가지와 육개장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였다. 얄팍한 일회용 그릇에 담겨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져 버리는 멀건 육개장을 바라봤다. 차마 그 그릇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질을 했다. 맹맹한 국물이 혀에 닿았다. 식은 밥을 말았다.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떠나간 그들에게 어울리는 음식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받아쓰는 육개장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조선일보

서울 원효로 ‘한아름전통육개장’의 육개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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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고 육개장 집을 찾으려면 신기하게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별로 없다. 대량으로 납품받는 프랜차이즈가 대부분이고 이것저것 파는 국밥집에서 곁다리 메뉴 중 하나인 경우도 흔하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보배집'은 육개장만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흔치 않은 곳이다. 이 집 역시 삼계탕, 선지해장국 같은 메뉴가 슬쩍 붙어 있지만 사람들이 찾는 것은 뻘건 기름이 둥둥 뜬 육개장이다. 공격적인 생김새와 다르게 국물은 무턱대고 진한 스타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잔잔하게 깔리는 육향이 서서히 위장을 채우고 어느새 땀이 나고 있는 형국이다. 얇게 떠 있는 달걀물을 건지면 그 밑으로 대파와 고사리, 당면이 소복이 깔렸다. 찬 바람이 먼저 드는 파주에 이런 식당이 있다는 것은 또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서울에 오면 을지로4가 '우래옥' 육개장을 따라가는 집이 많지 않다. 이곳에서 육개장을 시키기 위해서는 우래옥에서는 당연히 냉면을 먹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만 이겨내면 된다. 사기대접에 담긴 육개장은 그 모양새가 당당하다. 논밭에서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칼의 온기가 채 식지 않은 장군이 먹어야 할 것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속에 담긴 건더기의 면모에도 겸손함이 없다. 잘게 손으로 찢은 양지살은 거짓 없이 한우다. 부드럽게 이에 붙는 고기의 질감은 성가시거나 거추장스러운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통통한 하얀 대파 밑둥치를 씹으면 알싸한 단맛이 난다. 고사리와 당면 역시 세심하게 다듬어 넣은 티가 난다. 군데군데 참깨가 박힌 국물에 하얀 밥을 말아 먹으면 잔칫집에 온 것만 같다. 칼칼한 국물은 방심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자르듯 끝나는 말끔한 뒷맛은 영수증에 찍힌 숫자도 수긍하게 만든다.

발길을 돌려 용산구 원효로에 가면 '한아름전통육개장'이란 이름을 걸고 있는 집이 있다. 인적 드문 골목에 불 훤히 밝힌 모습을 보면 괜히 '장사는 되나' 걱정이 덜컥 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굳이 남 걱정할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점심 시간 꽉꽉 들어찬 사람들이 시키는 음식은 역시 육개장이다. 기름을 띄우지 않고 팔팔 끓여 국물에 녹여낸 이 집 육개장은 그 맛의 뿌리가 대구 등 이남이 아니라 이북이다. 대파를 세로로 길게 잘라 넣고 굵은 당면을 풀어낸 건더기를 퍼먹다가 결국에는 국물에 밥을 말고 만다. 이 집에는 육칼이라는 국수 메뉴도 있지만 국물이 스쳐가는 면보다는 국물을 품어버리는 밥과 함께하는 게 낫다. 선홍빛 국물에 단단히 깃든 무게감은 허기를 몰아내고 추위를 이긴다. 후끈거리는 장국 한 사발을 내미는 주인장의 손아귀에는 세상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지지도 않는 기세가 있다.

다시 보지 못할 그들에게 내밀고 싶은 음식도 그러했다. 내가 아는 그이들은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작은 일 따위는 웃어버렸다. 울음이 나오는 일에도 웃으며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는 잠깐 다른 곳을 돌아봤을 뿐이었다. 다시 보니 있어야 할 곳에 그들이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가져가버린 전화번호와 청하지 못한 한 끼 식사만 남았다.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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