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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지질시대 ‘인류세’를 아십니까… 닭뼈 화석이 많이 나올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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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인류세는 지구에 어떤 흔적 남길까

조선일보

지난 10일 호주 캥거루섬 화재 현장에서 구조된 코알라가 담요에 누워 있다. 호주 생태학자들은 코알라가 느리고 주식인 유칼립투스 나무가 불에 약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산불 피해를 크게 당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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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적응의 달인이다. 인터넷이 빛의 속도로 깔리고, 달리는 지하철에서 와이파이가 펑펑 터진다. 매운 음식이 유행하자 먹자골목에는 한 집 걸러 하나씩 마라탕집이 들어섰다.

이 적응력은 이상기후가 빈번한 세상에서 빛을 발한다. 혹한이 몰아치자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롱패딩을 둘둘 말고 추위에 맞섰다. 불볕더위는 목걸이 선풍기로 이겨냈다. 미세 먼지로 뿌연 날이 이어지자 SF 영화에 나올 법한 마스크를 착용한다.

지난주 난데없이 겨울비가 내렸다. 전국 곳곳에서 1월 강수량 신기록이 세워져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우산을 챙겼을 뿐이다. 이달 초부터 코알라와 캥거루 사진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호주 산불에 손발이 탄 코알라가 소방관에게 구조되거나 치료를 받는 모습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동물들도 가감 없이 공유됐다. 호주에서 지난해 11월부터 계속된 산불로 20명 이상이 숨졌고, 5억 마리 넘는 야생동물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시 면적의 100배인 6만㎢를 태우고도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과학계는 이 산불의 원인으로 건조한 날씨를 만든 기후변화를 꼽았다. 우리와 달리 코알라는 기후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호주 동물보호단체는 코알라가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기능상 멸종' 상태라고 분석한다. 한국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코알라 병원에 후원금을 보내며 사람들은 말했다. "인간이 미안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지구에 쌓은 업보를 의미하는 '인류세'가 요즘 과학계부터 사회학계·예술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세금의 세(稅)가 아니라 세대의 세(世)다. '인류세'를 아십니까.

플라스틱, 방사성물질, 닭뼈

조선일보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에 "지구에 인류가 끼친 영향이 너무 크니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인류의 시대)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46억년 된 지구의 지질시대를 나누는 단위는 고생대와 중생대의 대(代), 쥐라기와 백악기의 기(紀),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의 세(世)다. 이를테면 2020년은 신생대 제4기 홀로세다.

중생대를 지배한 공룡처럼 인류세 지층을 파보면 사람 뼈가 나올까. 인간의 확실한 흔적은 1945년 등장한 핵폭탄에 의한 방사성 낙진이다. '기술 화석'이라 불리는 플라스틱과 콘크리트도 인류세 지층에 기록될 예정이다. 2018년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팀은 '닭 뼈'가 인류세 화석으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닭의 뼈는 가늘고 작다. 그럼에도 매년 세계에서 닭 500억~600억마리가 도축되고 산소가 적은 쓰레기장에 매립돼 화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질시대의 이름은 누가 제안한다고 덜컥 정해지지 않는다. 고생대의 삼엽충과 중생대의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한 지층이 다른 지층과 다르다는 것을 학계에 증명하고 국제층서(層序)위원회가 인정해야 한다. 인류세는 아직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층에 준 인류의 영향을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이유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어느 지질시대보다 유명한 시기가 됐다. 인류세가 지질학계 용어를 넘어 인류와 지구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틀이 됐기 때문이다. 2018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단일 연구기관으로는 세계 최초로 설립된 '인류세 연구센터'에서는 문화인류학자, 인공위성 전문가, 예술가, 과학사학자 등이 모여 연구를 시작했다.

부끄러운 단어 된 '인류'

조선일보

호주 산불로 희생된 생명을 추모하고 기후 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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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 '코알라를 살려주세요' '지구가 불타고 있어요'…. 시민 100여명이 피켓을 들고 호주 산불로 희생된 생명을 추모하는 촛불집회였다. 환경 단체들이 모인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주최했다. "우리도 폭염 같은 이상기후를 겪으며 몸으로 느끼고 있다. 기후변화로 일어난 호주 산불은 남의 일이 아니다." 환경운동연합 이지언 에너지국장은 "지난 10일부터 참가자를 모았는데 많이 참석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인류세에서 자연재해가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은 "폭염·산불·홍수 같은 재해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 이상기후 현상은 더 잦아지고 강력해지는 추세"라고 했다. 호주 산불을 증폭시킨 인도양의 이상 수온은 아프리카 케냐에서는 홍수를 일으켰다. 이지언 국장은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재해"라며 "미세 먼지 문제가 그렇듯 기존 자연재해와는 대응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했다.

인류세의 '인류'라는 표현이 기후변화의 책임 소재를 흐린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류세가 떠안은 환경문제는 선진 공업국 탓이 큰데, 인류 모두의 잘못처럼 책임을 쪼갠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온실가스의 약 70%는 세계 인구의 20% 이하가 거주하는 선진 공업국에서 배출하지만 피해는 온실가스의 3%만 배출하는 저위도 지역 가난한 10억명에게 집중된다. 저지대나 비탈에 사는 사람들이 먼저 타격을 입는다"고 했다.

인류세의 끝은 멸종?

인류세의 시작은 언제일까. 후보는 많다. 농경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증했다는 8000년 전, 생물군이 대규모로 이동하고 멸종한 신대륙 발견,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산업혁명, 핵실험과 인구폭발로 지구 환경이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학계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 중 가장 유력한 시기는 20세기 중반이다.

인류세는 종말, 대멸종, 재앙, 파국 같은 단어와 자주 붙어 쓰인다. 조천호 전 원장은 "지구에 사는 78억 인구가 끼치는 영향은 이 행성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다. 우리 문명까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은 자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자연의 반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2018년 세계기상기구와 유엔환경계획이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산업화 이전과 비교한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오는 2100년까지 1.5도로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상 온도가 오르면 지구가 찜통이 돼 인간이 손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간 1만 년 동안 지구 평균온도가 4~5도 상승했는데, 산업화 이후 이미 1도가 올랐다. 생태학자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은 "지금의 기후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다.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가 생활한 것처럼 불편해도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20여년 전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자며 시작된 캠페인의 표어다. 먼 미래 누군가가 인류세 지층을 발견한다면 2020년을 산 우리의 흔적을 어떻게 판단할까. 조 전 원장에게 “지구가 위험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불볕더위에 에어컨을 끄기란 어려운 일 아니냐”고 물었다. “그건 한가한 이야기예요. 지금 수요를 줄이지 않으면 인류는 멸종으로 가게 됩니다. 이미 지구는 다섯 차례 대멸종을 겪어 봤어요.” 그는 단호했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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