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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동네 목욕탕 "오늘도 목욕합니다" [S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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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때 벗겨 심신 뽀송뽀송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 어릴 적 엄마·아빠 따라 간 목욕탕서 첨벙첨벙 / 기성세대 따뜻한 기억 / 젊은 층은 색다른 경험 / 사우나·찜질방에 밀려 20년 새 3000곳 문닫아 / 50여년 된 대호탕·마을탕 손님과 함께 늙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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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을 찾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마도 2000년대 이전 태어난 분이라면 동네 목욕탕은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는 특별한 공간일 겁니다. 어린 시절 아빠, 엄마 손에 이끌려 간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당하다 아파서 울고, 물장난하다 혼나고…. 목욕을 마친 뒤엔 매점에서 파는 바나나우유를 맛있게 먹던 평범하지만 행복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한두 개쯤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명절을 앞두고는 반드시 목욕탕엔 가곤 했죠. 대부분의 집에 욕실이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뜨거운 물을 마음껏 쓸 수 없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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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동네 목욕탕은 옛날에 참 흔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서 매일 샤워, 목욕을 실컷 하는 게 가능하고 집 밖에선 대형 사우나와 찜질방이 인기를 끌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욕탕은 휴일이면 반상회하듯 온 동네 사람이 모이던 전성시대를 뒤로한 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 지방행정 데이터 포털에 따르면 2000년에만 해도 9823개에 달했던 전국 목욕업장 숫자는 17일 현재 6740개로 줄었습니다. 여기에는 ‘온양온천’ 같은 대형 온천과 각종 사우나·찜질방도 포함됩니다. 상호 등으로 볼 때 찜질방은 1300여곳, 온천·스파는 30곳, 동네 목욕탕은 5200여곳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동네 목욕탕 숫자가 많아 보이지만 실상 사우나·찜질방은 계속 늘고 경쟁에 밀린 동네 목욕탕은 계속 문 닫고 있습니다. 전국 목욕탕 문화를 연구한 이인혜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목욕업소 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년 사이에 3000여곳이 문을 닫았다”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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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목욕탕 요금이 얼만지 아시나요? 어른은 5000∼6000원, 아이는 3000원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목욕료가 정말 중요한 물가였습니다. 정부가 강력히 요금 인상을 단속하고 목욕탕들은 동맹휴업으로 맞서곤 하던 전 국민적 관심사였는데 격세지감을 느끼네요.

1990년 9월부터 목욕료가 자율화됐는데 당시 기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정부는 85년 말 이후 동결된 현재의 요금 950원으로는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요금 자율화가 불가피하다는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목욕료 자율화를 시행할 방침이다. 그러나 목욕료가 자율화되면 요금이 크게 뛰고 자칫 업자들 간의 담합으로 시민들이 피해를 보게 돼…”

현재 국내에 1975년 이전 문 연 목욕탕은 330여곳. 서울에선 화곡중앙골목시장에서 1969년부터 영업 중인 ‘대호탕’과 홍제동에서 1971년 개업한 ‘마을탕’이 대표적인 동네 목욕탕입니다. 새벽 5시면 문 열어 누구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50여년째 뜨거운 물을 끓여온 곳입니다.

‘마을탕’의 경우 개업 당시 이름은 ‘새마을탕’이었습니다. 새마을탕은 목욕시설이 거의 없던 시절 새마을 운동의 목적으로 전국에 관제 보급된 우리나라 초기 대중목욕탕 이름입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그냥 ‘마을탕’으로 불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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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마을탕’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80, 90년대를 겪은 분이라면 이곳 구조는 눈감아도 떠오르는 ‘동네 목욕탕’ 그대로입니다. 직접 가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기분을 느끼게 될 겁니다.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곳은 매표소죠. 왼쪽은 여탕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2층 남탕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매표소 안에는 판매용 면도기·샴푸·린스와 ‘이태리타월’ 즉 때수건이 갖춰져 있습니다.

탕 모습은 새삼 설명할 필요 없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남탕과 여탕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여탕 사물함 위쪽은 자주 오는 단골 목욕용품 바구니로 빼곡히 차 있습니다. 세신사는 음료 판매까지 담당하는데 캔·병 음료는 물론 냉커피, 냉녹차, 감식초, 석류즙을 직접 만들어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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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 가운데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오래전 모습 그대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알루미늄 캐비닛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여탕 안은 여느 대중목욕탕이 그렇듯 바가지탕, 온탕, 열탕, 냉탕이 있고 2개의 세신대와 좌식 샤워기, 입식샤워기, 그리고 사우나실이 있습니다.

2층 남탕은 여탕보다 조금 더 큽니다. 예전에는 이발사도 있었으나 점점 손님이 줄어 지금은 세신사 겸 지하에 있는 보일러 관리부터 남탕과 여탕의 자질구레한 수리까지 모두 담당하는 ‘기관장’이 혼자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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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신은 여탕은 1만8000원에 얼굴 오일·오이마사지는 2만5000원, 전신마사지는 5만원 식으로 서비스가 다양합니다. 남탕은 단일서비스로 1만2000원을 받습니다.

문 연 지 40여년 된 목욕탕은 손님과 함께 나이를 먹어갑니다. 단골이 늘 오던 날짜, 시간에 와서 앉던 자리에 앉아 목욕하고 가곤 합니다. “내가 여기 30년을 앉았다”며 자리싸움이 날 때도 있습니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은 이처럼 손님도 정으로 오고, 목욕탕도 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엔 집 근처 동네 목욕탕에서 가족과 함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국립민속박물관의 ‘목욕탕·목욕에 대한 한국의 생활문화(저자 이인혜 학예연구사)’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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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의 역사

대중목욕탕의 역사는 근대화의 역사다. 우리나라에서 목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알로 발견되었고 동천에서 목욕을 하자 비로소 광채를 발했다는 식이다. 목욕이라기보다는 주술성 의례에 가깝다. 목욕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건 조선 시대부터다. 특히 임금의 온천 행차 등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 역시 목욕 문화 중심은 욕탕이 아니라 ‘대야’였다. 양반집이라도 방안에 대야 서너 개를 갖다 놓고 얼굴, 손, 발 따로 씻는 식의 부분욕이 일반적이었다. 비누는 팥을 곱게 갈아 밀가루처럼 걸러낸 팥 비누로 때를 뺐다고 한다.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목욕탕이 등장한 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던 시기다. 당시 아시아를 휩쓴 콜레라 등을 예방하기 위한 국가적 과제로 보건이 강조되면서 ‘목욕탕’이 지어진다. 최초의 근대 목욕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병합하면서 지금의 목욕탕 체제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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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남아있는 동네 목욕탕이 대거 등장한 건 1970년대부터다.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면서 깨끗한 물과 연료가 필요한 대중목욕탕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광복 후인 1947년 서울 시내에는 대중목욕탕이 총 86곳에 불과했는데 그마저 대부분 땔감 부족 등으로 개점휴업이거나 사용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전국 목욕탕은 1960년 770곳에서 1966년 1028곳, 1970년 1793곳, 1975년 2777곳, 1980년 3671곳, 1985년 6410곳, 1990년 8266곳으로 70년대부터 확 늘어난다. 이처럼 목욕탕 보급에 시간이 오래 걸린 건 깨끗한 물과 그 물을 데울 수 있는 연료를 조달하는 데에 사회 기반 인프라 확충 등이 선결되어야 하는 등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목욕탕은 늘어났지만 목욕료는 대표적 물가 인상 요주의 품목으로 집중 감시를 받아야 했다. 또 목욕탕은 지금의 지하철쯤으로 대중 이용이 많은 시설로서 손님 간 시비, 절도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각 가정에 현대적 수준의 목욕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대략 1980년대로 추정된다. 물을 가열할 수 있는 보일러 대중 보급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도 기름값 등이 비싸서 욕조의 상당수는 예비저수용이나 빨래, 김장용이었고 목욕은 목욕탕에 가야 할 수 있었다.

◆목욕 문화 연구 이인혜 학예연구사

“목욕탕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진짜 단순했어요. ‘우리는 언제부터 매일 씻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나’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 거예요. 전국 오래된 목욕탕을 돌아다녔는데 하루에 두 번씩 때를 민 날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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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펴낸 ‘목욕탕-목욕에 대한 한국의 생활문화’는 이인혜(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지난 2년간 우리나라 목욕탕의 역사와 현황을 조사한 결과다. 빠르게 사라져 가는 동네 목욕탕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기록물이다.

이 연구사는 “어렸을 때 겨울이면 집에선 목욕하는 게 큰 일이었다. 큰 양동이에 물을 데워서 찬물하고 섞어 씻거나 목욕탕에 가지 않으면 겨울철에는 몸을 씻기 힘들었다”며 “집에서 목욕하는 게 보편적이 된 건 불과 십년, 십오년 사이 생겨난 변화”라고 말했다. 가스보일러, 지역난방 등 상대적으로 값싼 난방 시설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기름보일러나 연탄보일러로는 집 목욕이 사실상 힘든 시대였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이 등장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이 연구사는 “1910년대라는 설이 있지만 1897년 신문에 목욕탕 광고가 나오는 등 최초의 목욕탕이 무엇인지는 계속 바뀌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목욕탕은 정말 중요한 생활공간이었어요. 일부 지역에는 목욕탕에 VIP층이 따로 있었는데 여기서 지역 유지들이 매일같이 모이는 모임도 있었고, 도난사건이나 여탕에 남자가 여장하고 들어가는 일 등 사건·사고도 비일비재했거든요. ‘목욕료가 치솟아 서민경제에 치명적’이란 신문 기사도 자주 등장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탕에서 조선인을 차별한다며 ‘조선인 자본으로 만든 탕이 필요하다’는 기사도 나타납니다.”

많은 세신사를 만난 이 연구사는 남탕과 여탕의 때 미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남성은 수건에 이태리타월을 감아서 쓰지만, 여성은 장갑 형태 이태리타월을 사용한다. 또 남성 세신사가 쓰는 이태리타월이 서울과 경기도에선 짧은 타월이지만 강원도·전라남도·경상남도에서는 대부분 긴 타월이다.

이 연구사는 “지난해 조사를 나갔던 목욕탕에 보고서를 보냈더니 그사이 문을 닫아 반송된 경우가 있었다”며 “동네 목욕탕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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