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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98] 고(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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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고(孤) 중심에서 뚝 떨어져 가는 기러기 한 마리 허공의 무게로 날개를 젓는다 맨홀 한 쪽 각도가 기우뚱 기우러지듯 어둠이 그의 날개를 고요히 접는다 허공, 깊은 허기다

―이영춘(1942~ )

기러기는 겨울 철새입니다. 겨울이 가면서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이니 곧 북향하는 높은 새들의 모습도 보게 되겠지요. 그들은 꼭 짝을 이루어 다닌다고 알려졌습니다. 짝을 잃으면 무리에서 떨어져서 살지만 무리를 아주 떠나지는 않습니다. 간혹 그러한 녀석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외롭겠지요. 간혹 한밤중에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들을 저토록 크게 떠들면서 가는 걸까 상상해보지요. 그들의 삶은 인간의 삶보다는 그 무대가 훨씬 크니 희로애락의 무늬도 인간의 그것보다는 훨씬 옅을지 모르겠노라고 부질없는 단정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북쪽으로 날아가지 않고 어둠에 의해 ‘고요히 접’힌 외로운 기러기가 있습니다. ‘맨홀’ 뚜껑의 묵중한 무게가 ‘기우뚱 기울어지듯’ 사라지고는 ‘깊은 허기’를 남긴 존재. ‘깊은 허기’의 눈동자가 분분한 애환들을 가련한 듯 내려다봅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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