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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박종호의 문화一流] 네 살 때 시력 잃은 작곡가, 아내가 묘사한 정원 풍경을 불후의 협주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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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名曲 꼽히는 '아란후에스 기타 협주곡', 同名 궁전만큼 유명

어릴 때 디프테리아로 失明… 악보 볼 수 없지만 작곡가 꿈 포기 안 해

60년 해로한 아내가 그의 눈 역할… 스페인王, 그에게 후작 작위 수여

조선일보

박종호 풍월당 대표


스페인 마드리드 아토차역에서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아란후에스라는 시골역에 닿는다. 스페인 왕실의 별궁이 자리하면서 형성된 소도시로 아란후에스 궁전은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궁전에 딸린 아란후에스 정원 또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명승지다. 이 궁전과 정원을 찾는 사람들로 시골 마을은 연일 북적인다.

아란후에스 시청 광장의 카페에 앉아 뜨거운 태양이 내뿜는 열기에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물이라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 있자면 매 정시 시청 건물의 대형 시계가 연주하는 음악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 협주곡일 이 음악은 궁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란후에스 협주곡'이다. 어떤 이들은 이 음악 덕분에 아란후에스 궁전과 정원이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던 사람들은 어느새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일어나 그 아름답다는 정원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그 정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그는 아내의 팔에 의지해 정원을 걸었다. 관목들이 우거진 숲속에 작은 수로와 연못들, 이국적인 분수와 고색창연한 석상들이 가득한 정원을 걸으면서 아내는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풍광 하나하나를 묘사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맹인 작곡가는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아란후에스 협주곡'을 썼다는 이야기다.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는 스페인 제3의 도시인 발렌시아 부근의 작은 마을 사군토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그는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당시 그 일대에 창궐했던 디프테리아는 끔찍했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목숨을 잃고 단 두 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로드리고였다. 아이는 목숨은 건진 대신 시력을 잃어서 평생 앞을 못 보는 삶을 살게 되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맹학교가 있는 발렌시아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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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는 작은 도시 아란후에스에 있는 스페인 왕실 별궁의 궁전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왼쪽 사진).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되었고, 식물학·수리학 등 왕가가 관심을 가졌던 인문학 분야 서적과 자료가 엄청나게 쌓여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오른쪽 사진은 '아란후에스 기타 협주곡'을 작곡한 호아킨 로드리고와 아내 빅토리아. /풍월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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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학교를 다니던 로드리고는 교과 중에서 유달리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했으며 열여섯 살이 되면서는 작곡까지 했다. 아이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평범했던 부모는 아들의 음악 공부를 어떻게 뒷바라지해야 할지 몰라서 반대했다. 그러나 아이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작곡 수업까지 마친 그는 귀국하여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악보를 그렸을까? 대필처럼 구술하고 받아 적게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설사 다른 이가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 넣는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확인하고 교정할 것인가? 매번 연주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지 않은가? 이처럼 로드리고에게 작곡이란 보통 작곡가의 열 배 아니 백 배의 수고를 들여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장애에 굴하지 않았고 자신이 택한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을 위해 자기 수입보다 더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조수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도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훗날 그를 위해 점자 악보를 그리는 기계가 개발될 때까지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단계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로드리고가 운명의 여성을 만난다. 그는 음악 활동을 하다 만난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캄히(1905~1997)와 연인이 되지만 빅토리아의 아버지가 완강히 반대하여 둘을 떼어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기어코 다시 만나서 결혼에 이른다. 이후 빅토리아는 60년 넘게 로드리고의 곁을 지키며 그의 눈과 손 그리고 발이 되어주었다.

로드리고는 교수로 30년 이상을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작곡을 했고, 결국 20세기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안달루시아 협주곡'과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등 많은 음악이 그의 작품이며, 그가 다룬 영역은 기악곡을 넘어서 성악곡, 발레, 오페라에까지 이른다. 특히 '아란후에스 협주곡'은 스페인의 대표적 악기인 기타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되는 협주곡으로 1940년에 발표된 뒤 공전의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 곡이 가진 스페인적인 색채와 열정적인 감성은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음반만 80종 이상이나 녹음되었을 정도니 그 인기를 알 만하다.

1981년 로드리고 부부가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묵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빅토리아는 연기 속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17층에서부터 계단을 이용해 지상으로 무사히 내려왔다. 이 일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멕시코 대통령은 "최고의 용기를 보여준 여성"이라며 빅토리아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로드리고는 친절하고 명랑한 사람이었지만 내면도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받았고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1991년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로드리고에게 후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니 명칭은 '아란후에스 정원 후작'이다. 음악가로서는 역사상 가장 높은 영예였다.

'아란후에스 협주곡'의 2악장을 듣고 있으면 여름날 스페인 정원의 신선한 향취가 난다. 하지만 어찌 그것만 느끼고 말 것인가? 그 아름다움 속에는 가장 힘든 제약을 지닌 채로 누구보다도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으면서 결국에는 어려서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룬 한 남자가 있다. 그 작은 노인은 가장 위대한 거인이었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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