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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보험료 올라도 웃지 못하는 車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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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이 '밑지고 판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게 상식이지만, 지난 19년 동안 한 차례를 빼고는 매년 적자를 본 상품이 있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자동차보험 얘기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 의무보험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사실상 가격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년 가운데 한 차례 빼곤 모두 손실

19일 손해보험업계에 따르면, 작년 1~11월 보험회사들은 자동차보험에서만 1조2938억원의 손실을 봤다. 12월까지 더하면 2010년(1조5369억 적자)을 넘어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손해보험사들이 자동차보험에서 적자를 보는 건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보험사들은 지난 2001년부터 2019년(11월 현재)까지 자동차보험에서만 12조530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흑자는 2017년 한 해에 불과하다. 공식적인 집계치는 없지만, 1988년 이후로 기간을 늘려도 자동차보험 흑자는 1997년, 1998년, 2017년 세 차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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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보험 적자는 한두 회사가 아니라 업계 전체의 문제다. 올해 주요 손해보험사들의 자동차보험 손해율은 대부분 90%를 넘겼다. 손해율은 보험사가 고객에게 받은 보험료 대비 내준 보험금의 비율을 말한다. 직원 인건비와 마케팅비 등 각종 사업비(보험료의 약 20%)를 고려하면, 손해율이 80% 이하로 관리돼야 흑자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업계 선두인 삼성화재의 자동차보험 손해율이 91%로 잠정 집계됐다. KB손해보험(92%), 현대해상(91.7%), DB손해보험(91.5%) 등도 90%를 넘겼다. 중소형사 가운데서는 100%를 넘긴 곳도 흔하다.

당국 가격 개입에 시장 원리 훼손

왜 민간 보험회사가 꾸준히 밑지고 파는 일을 반복할까. 업계에서는 금융 당국이 보험료 책정 과정에서 꾸준히 개입하는 게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명목상으로 보험료 책정은 보험사 자율에 맡겨 있다. 정부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보험 산업에 시장 경쟁 원리를 정착시키겠다"면서 단계적으로 보험 가격 자유화를 추진했다. 2000년에는 완전 자율화가 이뤄졌다고 선언했다. 지금도 법적으로는 보험사가 알아서 가격을 정하는 구조다.

그러나 업계는 "여전히 당국이 암묵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업계는 그에 따라 가격을 정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자동차보험은 의무 가입 보험이라는 이유로 당국 입김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 손보사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왜 보험사마다 인상률이 거의 같겠냐"고 했다. 이에 대해 금융 당국 관계자는 "보험료 책정은 보험사 자율"이라면서도 "보험사가 손해를 본다고 고객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을 떠넘기는 걸 바라볼 수는 없다"고 했다. 사실상 보험료 책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올해 보험료 인상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KB손해보험 등은 지난해 11월 말부터 보험개발원에 보험료율 검증을 의뢰했다. 보험사 자체적으로 책정한 보험료 인상 계획이 적정한지 검증을 받는 과정이다. 통상 2주 걸린다. 그런데 올해는 1개월이 지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보험사들이 계획한 인상률(5% 안팎)과 당국이 요구하는 인상률(3%대 중반)이 달라서 그런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결국 보험업계가 백기를 들고 올해 자동차보험 인상률을 3%대로 잡자, 보험개발원은 보험료율에 대한 검증 결과를 뒤늦게 보내왔다. 한 손보사 관계자는 "이렇게 가격을 좌지우지할 거면 아예 정부가 다시 공기업을 만들어 자동차보험을 파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실제 자동차보험 판매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보험사들도 있다. 메리츠화재는 자동차보험 판매를 줄이는 전략에 나서 손보업계에서 유일하게 실적을 선방하고 있는 회사로 꼽힌다. 작년 사모펀드에 인수된 롯데손해보험은 첫 구조조정 대상으로 자동차보험 영업 인력 감축을 택했다. 흥국화재 등은 모집 비용이 덜 드는 '다이렉트'로만 자동차보험을 판매하고 있다. 한 대형 손보사 관계자는 "정부 눈치 때문에 자동차보험을 안 팔기는 어렵다"면서도 "결국 자동차보험 보험료를 억누르면, 상대적으로 가격 통제가 덜한 다른 보험 상품들의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기훈 기자(m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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