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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태평로] 당구가 빚어낸 인생 패자부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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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출범 프로당구대회, 야구·배구 못잖은 인기 누려

수많은 휴먼스토리 주인공들 감동적인 진짜 드라마 연출

조선일보

강호철 스포츠부장


PC방과 온라인 게임 열풍으로 사그라들던 당구가 다시 뜨고 있다. 지난해 6월 국내에서 출범한 프로리그 PBA 투어가 기폭제가 됐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유럽 12국 선수들이 참가하는 이 리그는 케이블 TV 평균 시청률이 0.5%를 꾸준히 찍는다. 프로야구, 프로배구 인기 뺨친다.

오는 2월 상위 랭커들만 나서는 파이널 대회로 첫 시즌이 마무리되는데, 벌써 다음 시즌 스폰서 유치를 놓고 기업들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PBA 투어 측은 오는 5월 시작할 두 번째 시즌엔 대회를 7개에서 10개로 늘릴 계획이다. 팀 리그도 하반기 출범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PBA 투어의 성공적인 출범의 배경에는 2만개가 넘는 국내 인프라(당구장)가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당구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는 PBA 투어 성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얼마 전만 해도 당구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소수 최상위 랭커만을 위한 무대였다. 워낙 진입 장벽이 높아 많은 재야 고수들이 그 벽을 허물지 못하고 꿈을 접었다.

반면 PBA는 모두에게 문을 열었다. 꿈을 접었던 사람들이 다시 큐를 잡았고, 동호인까지 프로 희망을 품고 뛰어들었다. 세계당구연맹이 PBA 합류 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을 제한하는 바람에 세계 톱 랭커들이 많이 불참했지만, 그게 전화위복이 된 듯 더 많은 인간 승리 드라마가 연출됐다.

남자리그 1차 대회 챔피언에 오른 그리스의 카시도코스타스는 2013년 오른손 신경계를 크게 다쳐 선수 생명을 접을 뻔했으나 왼손으로 큐를 바꿔 잡아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경기할 때보다 두 배로 연습량을 늘렸다"고 했다.

여자리그(LPBA) 2·3차 대회 우승자인 임정숙씨는 갑상선기능항진증을 앓고 있다. 손발이 떨리고, 수면을 잘 이루지 못해 집중력이 떨어지는 병이라 정확성과 힘 조절이 생명인 당구에 치명적이다. 그는 임신과 부작용 때문에 약물 치료를 받지 못하자 근력 운동에 힘을 쏟으며 악착같이 선수 생활을 이어왔다. 그가 두 대회 우승으로 받은 상금은 3000만원. 이전까지 받은 다른 대회 최고 상금이 150만원이었다.

남자 3차 대회 우승자인 최원준씨는 생계 때문에 두 번이나 선수 생활을 그만뒀고, 중고 휴대폰 거래 영업을 하면서 동호인 대회에 참가하다 PBA를 통해 빛을 봤다.

낮에는 전기기사,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던 '투잡' 가장, 이라크 석유회사에서 일하다 프로 출범 소식에 단숨에 사표를 던지고 날아온 전직 회사원…. 모두 다 큐 하나에 희망을 건다.

'실버'들도 노익장을 불태운다. 서울당구연맹 회장을 지낸 68세 장성출씨가 1부에서 분투 중이고, 한때 예술구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김철민(68)씨는 2부리그에서 선전하며 1부리그 진입 가능성을 높였다.

PBA 리그는 TV조선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과 많이 닮았다.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경연 방식으로 흥미를 돋웠을 뿐 아니라 누구나 참가해 주인공을 꿈꿀 수 있는 무대가 됐다.

PBA 리그나 두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만루 홈런을 터뜨린 것이 출전자들의 탁월한 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참가자들이 털어놓는 사연을 듣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인가 눈물샘이 터진다. 그만큼 진솔하다.

종목 자체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며 화려한 '패자부활전'을 만들어 낸 당구 프로리그가 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고정관념을 깨면 새 길이 보인다. 가식 없는 휴먼 스토리가 진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가짜'와 '허식'이 판치고 힘을 지닌 세상이라 이들의 도전 속에서 더욱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진다.

[강호철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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