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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만물상] ‘마지막 거인’ 신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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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신격호는 ‘문청(문학청년)’이었다. 일제 말 고향 울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것도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젊은 시절 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졌다. 롯데라는 사명(社名)도 베르테르의 연인 ‘샤롯테’에서 따와 지었다. 롯데월드타워 앞에 괴테 동상까지 세울 정도였다. 그는 롯데 브랜드를 만든 것이 “내 일생일대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의 청년 시절은 낭만주의로 채색돼 있지만 23세 때 창업한 후로는 '꼼꼼함'을 트레이드 마크로 달고 다녔다. "23개 전 계열사에서 생산되는 1만5000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소비자 가격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롯데호텔을 지을 땐 세계 유명 호텔을 다 다녀본 뒤 카펫과 벽지 색깔까지 지정할 만큼 일일이 다 챙겼다. 백화점에 나가면 매장 진열 상태부터 나사못 하나까지 지적해 임직원들 혼쭐을 빼놓기 일쑤였다. '거인'이란 말을 좋아해 야구 구단 이름도 '자이언츠'로 지었지만 경영 스타일은 한없이 세심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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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에서 번 돈을 외교행낭에 숨겨 들여와 46세 때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고국 진출 당시 신문 광고까지 내고는 "조국을 장시간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툰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된다"면서도 성심성의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투자로 실행됐다. 호텔·백화점·음료·레저업에 속속 투자하며 롯데를 5대 그룹으로 키웠다. 그 마지막 결정체가 123층짜리 서울의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였다. 디자인을 23번이나 바꿔가며 입지에서 설계·시공까지 직접 챙겼고, 완공 후엔 한동안 49층 레지던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경영인으로서 그의 원점은 일본이었다. 한국 진출 이후 40여년간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은 일본을 오가는 '셔틀 경영'을 계속했다. 일본에서 축적한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가져왔지만 한국에서 더 큰 경영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롯데를 매출 기준으론 일본롯데의 20배, 종업원은 30배로 키웠다. 그는 한국에서 번 돈은 모두 한국에 재투자하겠다 약속했고 평생 지켰다.

▶1921년생 신 회장이 영면했다. 이병철(1910년생) 정주영(1915년생)에 이어 1세대 기업인 최후의 생존자였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라 하지만 우리 1세대 창업주들은 ‘기업 보국(報國)’ 정신으로 무장한 산업 전사(戰士)들이었다. 애국심을 기반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뛰어들어 성장의 기회를 찾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마지막 거인이 퇴장했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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