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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메트로폴리탄·휘트니미술관이 작품 소장한 한국사진가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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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서 개인전 'Jungjin Lee:VOICE'

묵직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한 자연

한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결합 프린트로

"사진 작업은 나를 알아가는 수행 과정"

중앙일보

Jungjin Lee, Opening 21 (2/10 + 3AP), 2016 ,Archival pigment print on Korean Mulberry paper 145.5 x 76.5 cm (paper size). [사진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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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만져봐도 될까요?" 사진전을 보러 가서 작품을 보다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매너 없다"는 핀잔을 들을 만하다. 그런데 왜 이 작가의 전시장에서 유독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을까. 비단 주름 같은 물결, 가시처럼 날카로운 나뭇가지들, 바위의 껄끄러운 표면, 금방이라도 모래바람이 일 것 같은 마른 흙길···. 한없이 촉각을 자극하는 작품 앞에서 손끝은 그것을 만지고 싶어 갈등하고, 또 갈등하게 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호주 국립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과 국내 주요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가 이정진(58)의 작품 얘기다. 이정진은 2010~2011년 프랑스 사진가 프레드릭 브레너가 기획한 'This Place(디스 플레이스)' 프로젝트에 유일한 아시아 작가로 토마스 스트루트, 스테판 쇼어, 요셉 쿠델카, 제프 월 등 세계적인 사진작가 12명과 함께 참여하며 국제 사진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서울 삼청로 PKM갤러리에서 이정진의 개인전 'VOICE(보이스)'가 개막했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순회 회고전 '이정진:에코-바람으로부터' 이후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그는 지난 2년간 작업해온 최근작 'VOICE(보이스)'의 대형 연작을 비롯해 이전의 'OPENING(오프닝)' 연작 중 엄선한 2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지에 붓으로 직접 감광 유제를 바르고 그 위에 인화하는 아날로그 프린트 수작업을 30년간 해온 이정진의 사진은 한지 표면에 흑백 입자가 숨 쉬는 듯한 질감이 압권이었다. 자연 풍광을 렌즈에 담되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듯한 화면은 회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 작업에서 그는 한지 아날로그 수제 프린트와 디지털 방식을 결합한 기법을 새로 선보였다. 한지에 인화한 뒤 고화질로 스캔하고 이를 다시 디지털로 프린트하는 방식이다.

광활한 자연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한 화면을 통해 그는 무슨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시장에서 이정진은 "문학에 비유하면 내 사진은 시(詩)에 가까울 것"이라며 "내가 찍는 대상인 바위나 흙, 나무 등은 시의 소재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봤다.



생각을 내려놨을 때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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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in Lee, Voice 01(Ed. 1/3 +2AP), 2019 Archival Pigment Print (Inkjet print) 152.5 x 213.3 cm.[사진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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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in Lee,Voice15 (1/7+ 3AP), 2019 Archival Pigment Print (Inkjet print) 108.5 x 153 cm. [사진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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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사진이 굉장히 촉각적이다.

A : "사진 속 이미지를 눈으로 읽게 한다기보다는 온몸으로 느껴지도록 전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내가 사막을 찍더라도 나는 사막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막을 통해 내가 느낀 직감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다."

Q : 렌즈에 잡힌 풍경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처럼 고요해 보인다.

A : "정지된 장면이지만 난 그 안에 울림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연작 제목도 'VOICE'다. 정지된 화면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숨처럼 떨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내 사진을 가리켜 사람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보인다'고 하더라. 하지만 내가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만은 그곳에 내가 현존한다는 느낌이 가장 충만할 때다."

Q : 'The American Desert(미국 사막)' 'Wind(바람)' 'Unnamed Road(언네임드 로드) 등 당신의 연작은 자연으로 시작해 자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A : "내가 찾아다니는 곳이 바다· 숲 ·사막 등 인적이 드문 곳들이라서다. 분주한 도시의 삶과 대척점에 있는 곳, 퓨어 네이처(pure nature·순수한 자연)를 자꾸 찾게 된다. 그런 곳에서 비로소 나는 내 마음이 열리는 느낌,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생각의 비움을 통해서 자연 속에서 조우하는 대상과 공명한다고 느낄 때 셔터를 누른다.” A :

Q : 어떤 순간에 그런 공명 상태를 경험하나.

A : "완벽한 상태라는 것은 내 느낌이 왔을 때다. 사진은 정말이지 '찰나'를 다루는 매체다. 하지만 나는 결정적인 샷을 위해 나무 밑에서 빛을 기다리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미 그곳에서 햇살, 공기 등이 어우러진 상태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가 내겐 '절대’의 순간이다. 그 순간은 삼각대 없이 단지 몇장의 컷으로 카메라에 담긴다."

이정진은 "사람 안에 신성(神性)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사람이 지닌 신성은 도시의 일상생활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자연에 놓였을 때 우주적인 기운을 받는다"는 것. 그는 이어 "내 안에 있는 신성이 자연의 원초적인 에너지와 만나서 작업이 이뤄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서 "신성의 실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그게 삶 또는 생명의 본질 같은 게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내밀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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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in Lee. Voice 2 5 (1/3 + 2AP), 2019 Archival Pigment Print (Inkjet print) 152.5 x 213.3 cm [사진 P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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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in Lee, Voice 42 (1/7 + 3AP), 2019 Archival Pigment Print (Inkjet print) 108.5 x 153 cm.[사진 P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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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풍경 사진인데 고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추상회화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가 뭘까.

A : "대상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찍기보단 내가 느낀 것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기 때문일 거다. 결국, 사진을 찍는 일이란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도에 처음 사막 여행을 하면서 'The American Desert(미국 사막)' 연작 작업도 그렇게 시작했다."

Q : 그런데 작품을 발표한 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고.

A : "그렇다. 사람들은 이정진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보고 있더라, 그때 알았다. 예술은 내가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도록 하는 거구나. 내 사진은 그 매개체구나···. 나는 사진이 내 일기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각 개인 밑바닥에 있는 마음을 들추게 하는 것이더라. 사람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데도 잘 몰랐던 것, 혹은 자주 들춰보지 않는 마음 상태 이런 것들을 내 사진을 통해 힐끗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 사진들은 더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일기장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순수한 마음 상태에 관한 조각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A :

이정진은 촬영을 시작하면 긴 시간 들이지 않고 빠르게 작업해 10~15분 만에 촬영을 끝낸다. "짧은 시간이지만 촬영을 마친 후엔 몸 안에서 뭔가 훅 빠져나가는 듯한 상태를 경험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뭔가 뻥 뚫린 듯, 슬픈 듯하면서도 동시에 충만함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렇게 촬영하고 나면 나중에 그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까 전혀 궁금하지 않다. 내게는 그 순간을 경험한 것 자체가 소중하다. 사진 찍으러 먼 곳까지 간 일은 오히려 보너스 같은 게 되는 거다." 촬영해서 얻은 사진들은 그에게 "내적 경험의 강렬한 흔적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내겐 마법 같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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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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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은 홍익대에서 공예(도자)를 전공하고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90년대 초기에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1923~2019)의 제자이자 조수로 활동했고, 그 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해오다 현재는 뉴욕에 정착해 작업하고 있다. 2016년 스위스 벤터투어미술관에서 대규모 회전을 열었으며, 이 순회전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정진:에코-바람으로부터')에서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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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바울 촬영,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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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전공과 달리 사진을 택한 이유는.

A : "미대에 입학한 뒤 사진 동아리 생활한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 내가 이 일을 오래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사진은 마법처럼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표현해주는 도구다."

Q : 사진 작업을 가리켜 '나의 내면을 알아가는 수행'이라고 했다.

A : "사람들은 나를 '21세기 현역작가' '여성 사진가'라고 부르는데 그런 타이틀이 저를 대변하는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거창하게 들릴까 봐 조심스럽지만, 내 작업은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게 내 목표는 아니다. 나의 정신적인 열림의 상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업은 계속될 거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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