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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어릴 적 뛰놀던 宮, 음악 살롱으로 바꾼 그녀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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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덕수궁 석조전서 신년음악회… 다문화가족 등 130여명 초청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함께 모차르트·베토벤 소나타 연주

"살짝 기침해도 돼요"에 웃음꽃… 앙코르는 '사랑의 슬픔·기쁨'

붉은 낙조가 기막히게 내리꽂힌 저녁이었다. 21일 덕수궁 석조전 중앙홀.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고궁 한가운데 만든 서양식 전각에서 바이올린 여제(女帝) 정경화와 함께하는 덕수궁 신년음악회가 막을 올렸다. 황금빛으로 장식한 이오니아식 기둥, 유럽식 벽난로가 엄격한 좌우대칭으로 짜인 공간에 장애인과 다문화가족, 문화재지킴이 등 초청받은 130여 명이 앉았다.

문이 열리자 초록색 벨벳 블라우스를 입은 정경화(72)가 피아니스트 김태형(35)과 함께 등장했다. 첫 곡은 모차르트 소나타 21번 마단조. 정경화가 말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하게 이 곡만 단조예요. 스물두 살 때 연주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쓴 곡입니다. 나는 여덟 살 때 이 곡을 연습하면서 '참 예쁜 곡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연을 알고 나니까 이 미뉴에트가 어떤 감정을 머금고 있는지 비로소 알겠는 거예요."

조선일보

21일 오후 덕수궁 석조전 중앙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공연이 끝난 뒤 정경화는 "온 정성을 다해 오늘 오신 손님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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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객석은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홀 면적 124㎡. 연주에 몰입한 그가 미간을 찡그릴 때, 눈썹의 미세한 떨림까지 보였다. 정경화는 때때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고 2악장 연주 직전에는 바이올린을 두 팔로 껴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축물이다. 1898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대한제국 황궁으로 설계해 1910년 완공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내부가 크게 훼손됐고 5년간 복원 공사 끝에 2014년 10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2015년부터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 석조전 음악회가 무료로 열린다. 1910년대 석조전에서 열린 고종의 생일 연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이 연주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기획됐다.

2018년부터는 덕수궁과 업무 협약을 맺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금호아시아나솔로이스츠와 실력 있는 음악가들을 초청해 기획 공연을 펼쳐 호응을 얻었다. 공연 일주일 전부터 덕수궁관리소 홈페이지에서 선착순 90명 신청을 받는데 매번 1~2분 만에 매진될 만큼 사랑받는다.

그러나 정경화 같은 '거장(巨匠)'이 석조전에 서는 건 처음이다. 그는 "지난해 9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연 이후 줄곧 휴식을 취하다 뜻깊은 곳에서 새해를 맞는 음악회를 열고 싶었다"며 "석조전 음악회를 떠올렸다"고 했다. "어린 시절 주말마다 덕수궁에서 뛰놀았는데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달팽이들을 잡아다 팔뚝에 줄지어 세워놓고 경주를 시키면 정말 재밌었어요." 그가 먼저 문화재청에 연락했고, 단번에 '오케이'가 왔다. 정씨는 2주 전 석조전을 찾아 음향도 확인했다. 전문 공연장이 아닌 탓에 소리가 풍성하지 않아서 잠시 고민했지만 "막상 연주를 시작하자 소리가 맑게 모여서 흡족하더라"며 웃었다.

이날 정씨는 곡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를 주도했다. 베토벤 소나타 7번 연주를 시작하기 전엔 객석을 향해 "살짝 기침해도 돼요"라며 긴장을 풀어줬다. "귀가 멀기 시작한 서른둘 바로 그해에 베토벤은 이 곡을 썼습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다가 갑자기 천둥이 들이치는데, 어릴 땐 '어쩌란 말이지?' 어리둥절했어요. 근데 살아보니 너무 이해돼…." 격한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일어나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앙코르!"가 터져 나오자 그녀 역시 활을 높이 들고 손뼉을 치며 잇몸이 드러나게 웃었다.

"슬픔을 먼저 받으시겠습니까, 기쁨을 먼저 받으시겠습니까?" 크라이슬러가 작곡한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기쁨'을 앙코르로 들려주기에 앞서 정경화가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다. 객석에선 일제히 "슬픔요!"가 터져 나왔다. 감미로우면서도 애달픈 선율이 황금빛 기둥을 타고 돌로 지은 궁전을 채워나갔다. 클래식 애호가인 50대 관객은 "최고로 고급스러운 살롱 음악회였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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