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정원을 꾸미기 위해 전국을 훑고 다니며 탑과 부도(사리 무덤), 석등 등 석조유물을 무차별로 긁어모았다. 중흥산성의 폐사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인부들을 데려와 몰래 수많은 유물들을 도굴해 반출해 갔다. 아담하면서 뛰어난 조각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쌍사자 석등은 1931년 대구의 재력가였던 오쿠라 다케노스가 무단으로 분해해 반출하는 모습이 주민들에게 발각돼 압수됐다. 쌍사자 석등은 그 뒤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석등은 국보 제103호로 지정돼 있다.
석등(石燈)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든 등'이다.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석등은 대략 280여 기에 달한다. 그런데 정작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는 뜻밖에도 석등 자료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웃한 네팔에 7개의 석등이 있지만 이 중 5개가 힌두교 계통의 석등인 것으로 확인된다.
불교를 정립하고 성장시킨 중국에도 산시성의 동자사와 석우사 등 단 2개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다만 일본은 7세기 전반 아스카시대, 8세기 나라시대, 9~11세기 헤이안시대 등 시기별로 부분품 등 일부 석등이 전해진다. 석등 문화가 발달했던 백제나 통일신라 등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우리나라에 유독 석등이 많은 이유는 뭘까. 국내 현전하는 280여 기의 석등 중 거의 완전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4분의 1 정도인 60여 개다. 완전품은 신라시대 석등이 가장 많은 26기이며 고려 31개, 조선 6개 등이다. 백제시대 석등도 있지만 부분품으로 전해온다.
불교에서는 불의 의미가 남다르다. 불가에서 등불은 지혜, 해탈, 자비, 선행, 재생 등을 뜻하면서 등화 관념이 오래전부터 널리 확산됐다. 여러 불경은 등불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은 "탑과 불상 앞에 등불을 밝히면 33천(천상계 또는 도리천)에 다시 태어나며 다섯 가지 청정(淸淨·깨끗하며 속됨, 허물이 없고 집착하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음)을 얻을 수 있다"고 기술한다.
'불설시등공덕경'은 "등불 하나하나가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는 상상의 산, 수미산 정상의 하늘이 도리천)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와 같으므로 불가에서 실행하는 모든 공양구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지옥에 떨어질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등화 공양을 하면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조상경(造像經)'의 상삼조상품 15칙(上三造像品十五則)은 "부처상 앞에서 새와 짐승을 던져놓거나 시주한 돈을 단 한 닢이라도 손해를 끼친다면 그의 아비는 지옥에 떨어져 돌아올 수 없으니 이들 가운데 등유를 구하여 부처에 공양을 하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고 언급한다.
광명(光明)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며, 등불은 부처의 광명을 내포한다. 등대가 밤바다의 배를 이끌 듯, 불교에서 등불을 밝힌다는 것은 어둠을 일소하는 동시에 부처의 진리를 만방에 비춰 중생들을 깨우치게 하고 선한 길을 택하게 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탄생일에 불을 켜고 복을 비는 연등(燃燈) 의식을 사찰에서 가장 중대하며 성대한 행사로 치러온 것도 그런 이유다.
등을 불상, 향로와 함께 가장 핵심적 불교 공양구로 인식했던 우리나라는 야외에 설치되는 석등에도 같은 의미를 부여해 비중을 두고 세웠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석등은 1차적으로 사찰 경내의 야간 조명으로 중요한 기능도 했다. 그와 함께 사찰 주변을 환하게 밝힘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종교적 진리의 표상으로서 역할도 지니게 했다. 조명시설인 동시에 신앙심을 일으키는 종교적인 조형물로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석등은 백제에서 제일 먼저 시작됐다. 삼국시대 석등으로 추정되는 초기 작품은 공주, 부여, 익산 등 모두 백제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는 아시아 불교국가들의 석등 조형 미술보다 단연 앞서는 것이다. 다른 불교국가에 비해 우리나라가 중생 구제의 상징물로서 석등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불교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통일신라시대에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어 고려시대에 다양한 형태와 문양의 혁신적 석등을 발전시켜왔다. 조선은 고려의 석등을 계승하면서 왕릉이나 사대부 묘에 석등을 설치하는 풍습으로 확산된다.
석등의 구조는 받침대인 대좌부, 불을 켜는 공간인 화사(火舍)부, 지붕인 옥개석 등 세 부분으로 이뤄진다. 화사부는 전체 평면 8면체에 전후좌우 4면에 창이 뚫린 것이 일반적이다. 대좌부를 사자, 용, 공양자상 등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지붕석, 대좌부에 문양을 새기기도 한다. 화사부에도 보살상, 사천왕상 등 무늬를 넣기도 하며 창의 크기도 다양한 모양을 조각한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생동감 넘치며 세련된 조각기법이 특징이다. 국보 석등 중 번호가 제일 앞선다. 조선고적도보 4권(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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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석등은 총 5점이다.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44호 장흥 보림사 석등,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다.
광양 증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 일제강점기 도굴꾼에 의해 무단 반출됐다가 압수돼 경복궁을 거쳐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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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현존하는 사자 조각 중 조각 기법이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팔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등장했다.
6.4m높이의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불교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에 유독 석등이 많다. 등불은 부처의 광명(진리)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광명을 만방에 비춰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많은 수의 석등을 조성했던 것이다. 조선고적도보 4권(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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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전체 높이가 무려 6.4m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다. 8각으로 이뤄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팔각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훌륭한 조화를 보여준다. 둔중한 감이 느껴지지만 활짝 핀 연꽃의 소박미와 화사석, 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도 정확한 시기를 모르지만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녔다. 화사석 4면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이 정교하고 세련돼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장흥 보림사 석등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보림사는 헌안왕 4년(860)에 창건됐으며 그 뒤 계속 번창해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췄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석등은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4면에 창을 뚫었으며 그 위에 넓은 지붕돌을 얹고 각 모서리 끝부분을 꽃장식으로 마무리했다. 석등 지붕 위에 여러 장식을 새겼다.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처럼 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했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장식이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인다. 보물 석등은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 보물 제4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을 포함해 총 21점이 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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