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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왜냐면] 뇌물의 흔적, 뇌물의 진실 / 정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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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민걸 ㅣ 공주대학교 환경교육과 교수

한 국회의원의 딸이 부정 채용되었지만 뇌물 거래의 직접 증거가 없어 그 국회의원을 뇌물죄로 처벌하지 않겠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뇌물수수 혐의자들 사이에 거래가 오고 간 단 한차례의 만찬만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단 한차례 만찬의 카드 결제 시기가 부정 채용 시기보다 너무 이른 시기였기 때문에 부정 채용은 있었으나 뇌물 거래는 없었다는 것이 판사의 판단이다.

이 국회의원의 뇌물수수에 관한 1심 판결은 권력층의 뇌물죄와 관련하여 대가성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구실로 무죄를 준 또 하나의 판례다. 국민이 무소불위 권력의 독재에 길들여져 있던 과거에는 권력층이 대놓고 가져오라고 성깔을 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층의 무법에 대한 인내가 거의 사라진 이후 국민의 시선을 무시하고 대가성을 부리는 ‘권력 미숙아’나 대가성에 응하는 ‘공여 미숙아’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보통의 권력형 뇌물수수에 관련된 이들은 대개 평소에 친분을 쌓아놓고 있다가 판사가 인용하는 대가성이 직접 드러날 수 있는 시기에는 만나기는커녕 연락조차 하지 않게 마련이다. 오래되었거나 앞으로 형성될 연줄을 확신하는 상황에서 이심전심으로 원하는 것을 서로 알고 있기에 대가가 직접 오고 가는 시기와 상관없이 공여자는 뇌물을 자발적으로 공여하고, 권력자는 대가를 스스로, 때로는 미리 보답한다. 이것이 부패 권력층의 실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권력층이 즐겨 찾는 메뉴가 대가성이 되었다. 부패 권력층 스스로 뇌물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력한 구실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판사가 대가성 운운하며 무죄를 판결할 때마다 국민은 허탈해진다. 그러면서도 권력층에 줄을 대려고 노력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이 부패 사회의 특징이다.

이번 사건에서 무죄 판결의 구실이 된 건 부정 채용보다 이른 시기에 카드로 결제된 만찬 대금 71만원이다. 이 금액은 제 돈으로 먹지 않는 권력층에게는 하찮은 금액일지 모르겠지만, 국민에게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이런 거창한 식사를 대접하고 접대받는 사이에는 끈끈한 연줄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이런 사이에 굳이 서로 원하는 것을 직접 청탁할 필요가 있을까. 또한 연줄이 형성된 사이에는 언젠가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주고받는 행위나 이권이 굳이 동시에 일어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단 한차례만 만났다는 범죄 혐의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하며 카드 결제 내역이 없는 만남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판사를 과연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

누가 대놓고 뇌물 거래를 하며 흔적을 남기려고 할까. 이런 사건에서 카드 결제 내역이라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 누구나 알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조차 부정할 수 없는, 국회의원 딸이 부정 채용되었다는 확고한 사실이다. 부패 권력층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증거가 남지 않게 하거나 증거를 인멸 또는 위조할 수 있다. 따라서 부정 채용과 같은 명백한 사실이 확인될 때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대가성, 떡값, 또는 용돈이라는 허망한 구실을 동원하지 않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판결하는 사법부를 국민은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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