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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작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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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문학동네(2019)

한겨레

작가의 미발표 초기 단편 유고집이 나오면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반갑다는 마음도 있지만.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다니 놀라기도 하고, 생전의 작가가 내보내지 않은 원고까지 다 넣으면 고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떠오른다.

<카메라를 보세요>는 커트 보니것이 썼던 초기 단편 중 에스에프(SF)와 추리소설적 성격이 있는 미발표작 중심으로 모아서 낸 작품집이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만 세면, 수필집 <나라 없는 사람>을 빼고라도 <세상이 잠든 동안> <아마겟돈을 회상하며>에 이은 세 번째 유고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카메라를 보세요’는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간접 살인을 의뢰할 가능성”을 다룬다는 면에서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모티브를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나아간다. ‘개미 화석’은 우화적으로 현대 사회의 통제를 비판한 환상적 에스에프 단편이다. ‘작고 착한 사람들’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길에서 주운 페이퍼 나이프 속에서 마이크로 외계인을 발견한다. ‘푸바’와 ‘셀마를 위한 노래’처럼 인간을 틀에 끼워 맞추는 체제에 대한 위트 있는 비판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따뜻한 소품도 있다.

내가 편집자라면 표제작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여긴 작품은 ‘우주의 왕과 여왕’이다. 대공황 시절이지만 부유하고 아름다운 연인 헨리와 앤에게는 불행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어느 날 밤 공원을 가로질러 가던 두 사람은 기괴한 발명가 스탠리 카핀스키와 마주친다. 헨리와 앤은 즉각적인 위협을 느꼈지만, 카핀스키는 자기의 집으로 가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우주의 왕과 여왕과 같은 두 사람이 카핀스키의 발명품에 관심이 있고 구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머니가 편히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어리고 순진한 헨리와 앤은 카핀스키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연극이 성공을 거두려는 찰나 경찰이 들이닥친다. 이 사건으로 헨리와 앤의 세계는 달라진다.

인류의 고난과 지구의 최후를 그려낸 커트 보니것의 장편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은 별안간 긍정적으로 마무리되는 이 단편들을 낯설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어떤 재난이 일어나도 늘 인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유머가 있었다. <카메라를 보세요>는 우리의 세계가 직면했던 비극을 희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던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세워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집이다. 친구인 밀러 해리스에게 보낸 편지가 서문 격으로 실려 있는데, 여기서 커트 보니것은 다니던 제너럴 일렉트릭 사를 그만두고 작가로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이다. 단편 하나하나에 후에 위대해질 작가의 젊은 각오와 분투가 서렸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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