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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 화두로 30년···하버드 출신 스님이 승복 벗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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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가는 ‘제일 잘 복종하는 제자’가 될 것 같았다. 이걸 깨지 않으면 영원히 갇힐 것 같았다.”

10일 서울 광화문에서 테오도르 준 박(55)을 만났다. 지금은 머리도 기르고, 캐주얼복을 입고 있다. 승복을 벗기 전만 해도 그의 법명은 ‘환산 스님’이었다. 재미교포인 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머리를 깎고 송담(94) 스님의 제자가 됐다. 출가한 지는 꼬박 30년, 송담 스님의 시자 생활만 무려 15년간 했다. 송담 스님 역시 그를 각별히 여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던 그가 2년 전에 돌연 환속했다. 왜 그랬을까. 2014년 첫 인터뷰 후 7년 만에 마주 앉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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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참선을 가르치기도 했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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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왜 승복을 벗었나.

A : “내가 사는 모습이 진실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Q : 진실하지 않다는 건.

A : “성직자의 혜택이 뭔가. 세금 안 내고, 공짜로 먹고 자고, 모든 걸 받으며 산다. 나도 그걸 당연시했다. 그런데 너무 가식적으로 변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이더라. 내가 가르치는 것을 정말 내 깊은 마음속에서, 나의 인생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떠들기만 하고 사는 건 아닌가. 내가 정말 싯다르타의 정신대로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가 당시 그는 22살이었다. 지금은 한국말이 상당히 유창하다. 출가 당시에는 한국말을 거의 못했다. 층층시하 엄격한 절집 문화가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려 30년 세월을 송담 스님 아래서 출가자로 살았다. “어느새 복종하는 마음이 내게 배이더라. 새로운 걸 개발하고,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더라. 그게 습관이 되고, 나는 그 습관의 노예가 되어 있더라. 그래서 승복을 벗었다.”

Q : 그렇다고 승복까지 벗었나.

A : “여기서 치고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이 안에 갇히겠다 싶었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에게 그건 악몽이다. 나는 참선을 믿지 못해서 떠난 게 아니다. 참선을 믿기 때문에 떠났다. 스승을 못 믿어서 떠난 게 아니다. 스승을 믿기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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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용화선원에서 수행하던 시절의 테오도르 준 박. 법명은 '환산'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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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승복을 벗겠다고 했을 때 송담 스님은 뭐라고 했나.

A : “‘하루빨리 돌아오너라!’ 스승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저 합장했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가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터득한 선 수행의 알갱이를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보다 쉽게, 보다 친근하게, 보다 자세하게, 보다 과학적으로, 보다 현대적으로 나누려고 한다. “굳이 승복을 입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굳이 머리를 깎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나. 나 자신을 더 이상 ‘선생’이나 ‘전문가’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가진 걸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할 뿐이다.”

그는 수년 전에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페이스북 본사의 초청으로 ‘선(禪) 명상’을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다. 당시 강당에는 100명 정도가 모였다. 대부분 20대와 30대, 젊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 인구는 3억 명이다. 그중 1억 명이 명상을 체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종교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는 명상 방식을 선호한다.”

Q : 페이스북 본사에 모인 청중은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명상에서 무엇을 기대하나.

A : “청중은 주로 프로그래머와 신제품 개발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해결(Problem solution) 능력을 키우고 싶어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초월할 수 있는 탁월한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고 싶어했다. 그들은 주류 과학을 믿는 사람이다. 한국 불교에서 말하는 영가(靈駕)나 불성(佛性)은 안 믿는다. 그런데도 한국 불교의 참선 수행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놀랍더라.”

Q : 그 이유가 뭔가.

A : “자신들이 믿는 사상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려고 했다. 그래야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선인견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정말 인상적이었다. 페이스북 본사에는 명상을 할 수 있는 작은 선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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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자세를 취해달라는 주문에 테오도르 준 박이 서울시립미술관 앞 벤치에 앉았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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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 한국 불교의 참선 수행에 기대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미국인은 뭘 믿고 싶어하는 게 아니다. 뭔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고 싶어한다. 선(禪)에 끌린다는 건 내 몸과 내 마음으로 느끼고 싶다는 말이다. 나와 진리, 그 사이에 중개인이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중간에 스승이 있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내가 신과 직접 만나고 싶은 거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스님이 말하는 걸 내가 직접 맛보고 싶은 거다.” 그는 “20세기가 ‘원자의 시대, 유전자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의식의 시대, 내면의 시대’”라고 했다. 참선은 우리 내면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환속한 뒤에 2년간 그는 잠적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최근에 모습을 보인 그는 『참선』(나무의마음) 이란 제목의 두툼한 책 두 권을 출간했다. ‘참선’을 무기로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한 셈이다. 책에는 출가 30년간 그가 몸소 겪고 터득한 참선의 노하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첫단추로 돌아간 셈이다. 처음 불교를 알고자 했던, 처음 머리를 깎고자 했던 ‘그때의 마음’으로 말이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는 몸과 피가 한국인인데, 왜 미국에 와서 사나?” 엄마는 “한국전쟁 때문에 사회가 무너져서 그랬다. 보다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해 이민을 왔다”고 답했다. 그 말에 어린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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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이 최근 출간한 '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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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이 최근 출간한 '참선'



Q : 왜 충격을 받았나.

A : “어린 내게는 큰 나라, 작은 나라의 개념이 없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았다. 미국처럼 이렇게 큰 사회도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부모님은 영원히 살고, 집도 영원히 있고, 그 땅도 영원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질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내게는 그늘이 생겼다. 다른 아이들처럼 같이 뛰어놀며 웃고 그랬는데 달라졌다.”

어린 그의 그늘은 “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통한다. 그때부터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신화와 전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마음속에 물음이 생겨나니까, 공부도 덩달아 잘 되기 시작하더라.” 그의 집안은 불교를 믿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에 와서 가족과 함께 한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에게 “내가 왜 나로서 태어났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한국인인데 왜 미국에서 태어났나?’라는 물음이었다. 스님은 ‘카르마(업)’를 언급하며 책을 하나 건넸다. 영어 공부를 할 겸 스님이 갖고 있던 헤르만 헤세의 영문 작품이었다. 제목은 ‘싯다르타’.

그해 여름방학 내내 그는 그 책을 읽었다. 이후에도 그랬다. 중학생 때도 읽었고, 고등학생 때도 읽었고, 대학생 때도 읽었다. 지금껏 스무 번 이상 읽었다. 그만큼 ‘싯다르타의 삶’을 좋아했다.

Q : 11살 때 『싯다르타』를 읽고 이해가 갔나.

A :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시키지 않아도 항상 책을 읽었다. 그 해결책을 알고 싶었다. 중학생 때는 작가나 예술가가 꿈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성직자가 아니라 글 쓰는 작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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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의 자자인 헤르만 헤세. 테오도르 준 박은 그 작품을 지금껏 스무 번 정도 읽었다고 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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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읽어도 풀리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어떤 곳인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이런 물음들 말이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뉴욕에서 숭산 스님이 법회를 했다. 그가 가서 영어로 하는 법문을 들었다. 어린 중학생이 앉아 있는 걸 보고 숭산 스님이 물었다. “너는 왜 여기에 앉아 있나?”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자 숭산 스님은 짧은 영어로 “그건 공부하는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다”며 “유 머스트 두 젠!(You must do Zen, 참선을 해야 한다)”이라고 말했다.

Q : 숭산 스님 영어 법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A : “숭산 스님은 한국어 법문보다 영어 법문의 임팩트가 훨씬 더 컸다. 짧은 영어로 핵심을 뚫으며 이야기했다. 가령 ‘(미국인이 주로 하는) 심리(세라피) 상담이 자전거를 타는 거라면, 선(禪)은 스타트랙이다. 광속으로 가는 우주선처럼 ’팍‘하고 날아간다. 세라피는 점점 노력해서 되는 것이고, 참선은 순간이동이다’라는 식이었다.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자신이 쓴 에세이를 대학 측에 제출한다. 그는 하버드대 철학과에 지망했다. 그의 에세이는 ‘싯다르타와 젠(Zen)’에 관한 글이었다. 당시 지도 교사는 “이런 이상한 책을 풀어서 쓰면 합격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숭산 스님은 달랐다. 그의 에세이를 읽고서 법회 시간에 낭독하도록 했다. 대부분 미국인인 청중을 향해서 말이다. 결국 그는 하버드대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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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스님이 생전에 외국인 제자들 앞에서 법문을 하고 있다. 숭산 스님은 외국인 출가자를 위해 '관음선종'이란 종단을 새로 만들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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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왜 철학과를 지망했나.

A : “부모님은 의사나 로펌의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불평은 하셨지만 반대는 안 하셨다. 불교와 도교, 힌두교 등을 철학과에서 다루는 줄 알았다. 가서 보니 아니더라. 비교종교학과에서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전공을 비교종교학으로 바꾸었다.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도교, 유교 등 세계의 각 종교를 한 바퀴 훑었다.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더라.”

Q : 어떤 공통점인가.

A : “나무가 한 그루 있다. 10명의 화가에게 그걸 그리게 했다. 화가들은 자라난 역사적ㆍ인종적ㆍ문화적 배경이 다 다르다. 그럼 어찌 되겠나. 같은 나무를 그려도 모두 다른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그려도 피카소와 고흐, 미켈란젤로, 동양산수화의 그림이 다 다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실제 그 나무를 본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그 모든 그림이 하나의 나무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그 나무를 한번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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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은 "사람들은 후회 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후회를 통해서 배운다. 후회하고 있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다"고 했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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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에 그는 뉴욕의 로펌에 입사했다. 로펌을 다니면 로스쿨 진학도 쉽다. 로스쿨에 다니면서 입사한 로펌에서 인턴을 해도 된다. 그러니 성공을 향한 첫걸음을 제대로 뗀 셈이었다. 그런데 그는 로펌에 사표를 냈다.

Q : 왜 로펌을 그만두었나.

A : “로펌에서 일하며 느낀 건 ‘지루함’이었다. 회사들이 서로 소송할 때 온갖 증언과 기록들이 나온다. 나는 그걸 받아쓰는 일을 했다. 몇 시에 누구랑 전화했느냐, 누가 서명을 했느냐, 몇 시에 복사를 했느냐 등.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모은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이 일을 평생 동안 못 하겠다’ 싶더라. 로펌에서 일하는 윗사람들은 돈을 엄청나게 잘 버는 변호사들이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

Q :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나.

A : “짜증을 잘 내고, 불안해 보였다. 재미 삼아 서로 비꼬고 꼬집고 괴롭혔다. 당시 나는 스물 너덧 살쯤 됐다. 이 길로 쭉 가면 어떻게 될까.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물질적인 걸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걸 취득하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로펌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출가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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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은 "미국인들은 선 명상을 미래적이고, 진보적이고, 획기적이고, 혁신적이고, 민주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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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소문 끝에 ‘당대의 선지식’이라는 송담 스님을 찾아가 머리 깎고 출가했다. 그리고 ‘이뭣고’란 화두를 품고서 간화선 수행을 했다. 출가 후 14년이 됐을 때 송담 스님의 시자가 됐다. 그때부터 15년간 송담 스님을 곁에서 모셨다. 그리고 2년 전 승복을 벗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행 중이다. 인도와 발리 등에서 요가와 호흡법도 배웠다. 최근에는 남미 코스타리카를 다녀왔다. 그곳의 샤먼들을 만났다. 그는 ‘앙크(Ankh)’라고 불리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앙크는 이집트의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생명의 열쇠’ 혹은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되는 상형문자다. 그는 “내게 이 목걸이는 내 마음 속의 어린 아이를 다시 얻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환산 스님은 이제 테오도르 준 박이 됐다. 승복 입은 수행자에서 승복 벗은 수행자가 됐다. 그는 유투브에서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참선법’등도 소개한다. 앞으로 그가 종교적인 틀과 문법, 제도와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갈 마음공부는 어떤 걸까. 그게 벌써 궁금해진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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