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현지시간) 총선을 치른 아일랜드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수십 년 동안 잊힌 정당이었던 '신페인당'이 의회 160석 가운데 37석을 차지해 원내 2위 정당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아일랜드는 물론 영국과 유럽연합(EU)마저 이번 선거 결과에 경악했다. 신페인당이 아궁이에 던져 넣은 '아일랜드 통일'이라는 불씨 덕분에 가마솥에 담겨있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또한 끓어넘치게 생겼다.
신페인당의 역사는 매우 극적이다. 1801년에 영국에 합병된 아일랜드는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을 벌였고 1905년 더블린에서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신페인당이 결성됐다. 당의 이름은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 토착 언어이며 '우리 스스로'라는 의미다. 신페인당은 1916년 더블린에서 발생한 부활절 봉기 이후 민족주의 정당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지역구를 석권했다. 당시 대표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이후 100년 가까이 유명세를 떨칠 무장 독립단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창설했다. 이듬해 신페인당은 IRA와 함께 영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였다. 지친 영국은 1921년에 친영파 인구가 많은 북아일랜드 6개 주만 영국에 남고 나머지는 26개 주는 영연방 국가로 독립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신페인당 내부에서는 영국의 제안에 찬반이 갈렸으며 결국 내전이 발생, 찬성파가 승리했다. 찬성파는 신페인당에서 빠져나가 통일 아일랜드당과 공화당을 창설해 올해까지 번갈아 집권했다.
한때 아일랜드 집권당이었던 신페인당에는 분단을 거부하는 급진인사와 과격파 IRA만 남았고, 1970년 무장 투쟁을 거부하는 세력이 떨어져 나가면서 재야 정당 수준으로 위세가 줄었다. 영국은 과격 IRA를 테러 단체로 지정하기도 했다. 결국 신페인당은 1998년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변신했다. 민족주의 좌파 이념을 내세운 신페인당은 경제난과 브렉시트에 대한 반감에 힘입어 이번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으며 옛 식구들과 의회를 삼분하게 됐다.
신페인당은 총선 전후로 공공연히 아일랜드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를 열겠다고 주장했다. 현재 북아일랜드에서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해 EU와 브렉시트 합의에서 이행기간 동안 북아일랜드를 EU 관세 동맹에 머물게 하는 대신, 영국 본토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통관 절차 시행 등 '사실상 국경'을 그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를 버렸다는 것이다. 신페인당은 이를 놓치지 않고 통일 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다. 메리 루 맥도날드 신페인당 대표는 BBC와 인터뷰에서 EU가 과거 독일 통일을 도왔던 것처럼 아일랜드 통일을 도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미 4년 가까이 영국과 브렉시트로 씨름했던 EU는 더 이상 영국과 아일랜드 문제에 개입하길 원치 않는다. 문제는 이제 신페인당이 아일랜드 통일을 볼모로 브렉시트 무역 협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EU가 올해 말 이행기간 종료까지 영국과 무역 협정을 비준하려면 아일랜드를 포함해 EU 27개국의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하다. 동시에 영국은 EU가 통일을 지지해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이자 EU 영역으로 인정한다면 정치적으로 더 이상 EU와 협상을 할 수 없다.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이탈할 경우 현재 진행형인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을 저지할 구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아일랜드 내부에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국민투표가 어렵다고 본다. 아직 의회의 3분의 2를 가지고 있는 중도 정당들은 괜히 국민투표를 꺼냈다가 북아일랜드의 친영파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미 불씨가 붙은 만큼 영국과 아일랜드, EU 간의 긴장은 점차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pjw@fnnews.com 박종원 국제부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