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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포스트 봉준호’의 계단은 튼튼한가]획일적 공모전·흥행 우선·자비 제작…못 버리면 ‘봉준호’는 다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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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갈수록 기피하는 ‘연출 지망생·신인 감독’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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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찍는 데 400만∼1000만원

지원금 100만원 안돼 개인 돈으로

졸업 후 진로 막막 ‘기술’로 전향


제작사, 검증된 감독들 선호

감독 데뷔 후 아르바이트 전전도


“똑같은 시나리오 들고갔더라도

젊은 감독이었다면 투자됐을까”

봉 감독도 열악한 제작 환경 지적


경향신문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으로, 국내 정치·사회·문화계 이목이 그 어느 때보다 영화계에 집중되고 있다. <기생충>이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당연히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고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하나하나 챙긴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제2·제3의 봉준호, ‘포스트 봉준호’가 나올 수 있을까. 봉 감독은 1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 젊은 감독이 (제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나 <기생충>과 똑같은 시나리오를 가져갔을 때 투자받거나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냉정하게 질문해보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봤다.

■ ‘진로’ 고민에 줄어드는 ‘연출’ 지망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영화과 4학년 ㄱ씨.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다양한 영상 활동을 해온 ㄱ씨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영화과에 진학했다. 입학 당시 동기 중에는 감독(연출) 지망생이 많았지만, 마지막 학년을 앞둔 현재 동기 50여명 중 연출 지망은 2명뿐이다. 연출 지망이 급감한 것은 다름 아닌 ‘돈’ 때문이다. 졸업작품으로 40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찍는 데 적게는 400만원, 많게는 1000만원이 넘게 든다.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금액은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ㄱ씨는 “물론 적은 돈으로 대충 찍을 수도 있지만, ‘포스트 봉준호’를 꿈꾸는 입장에서는 사비를 들여 찍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출 지망인 또 다른 재학생 ㄴ씨는 “연출이 제작비를 다 내는 문화가 있다”며 “<기생충> 속 부잣집처럼 돈 많은 집안이 아니면 빌리거나 방학 때 하루 종일 일해서 모아야 한다. 아르바이트 하나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빈부격차가 졸업작품 제작에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이다. ㄴ씨는 “영화의 질이 꼭 제작비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여유가 있으면 더 경험 있는 배우·스태프를 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출 지망이 줄어드는 것에는 ‘불안정한 진로’도 한몫한다. 유튜브 등 미디어 다양화로 영상 콘텐츠 제작 수요가 늘어나면서 촬영·사운드·편집·컴퓨터그래픽(CG) 등 기술 분야는 진로가 다양하지만, 연출은 감독으로 데뷔하지 않는 이상 비전이 뚜렷하지 않다. 이 때문에 대학 졸업 전부터 ‘플랜B’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ㄱ씨는 “기술 분야는 먹고살 길이 연출에 비해 더 보장되는 측면이 있고,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며 “연출 지망은 금전적 사정이 풍부하지 않다면 다들 다른 살길을 구상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저도 그나마 학교에서 배운 지식·경험을 활용해 배우 지망생들의 영상 프로필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창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들이 제작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정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공모를 통해서다. 그러나 이제 막 영화계에 입문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를 뚫기가 쉽지 않다. ㄱ씨는 “포트폴리오를 요구하거나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시나리오를 정말 잘 쓰거나 기존에 상을 받은 게 없으면 기회를 얻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공모 심사 기준이 다소 획일적이라는 불만도 나온다. ㄴ씨는 “제작 지원을 받는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드라마”라며 “그러다보니 기존 당선작들과 비슷한 유의 영화를 찍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대입을 위해 ‘족보’를 구해 공부하듯 영화도 ‘맞춤형’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 ‘이거 못 팔아’에 막히는 신인 감독들

고된 과정을 거쳐 감독으로 데뷔한다고 해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로 꼽힌다.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대학원) 과정 졸업작품으로 장편 감독 데뷔를 한 ㄷ씨. ㄷ씨는 졸업작품으로 국내 유명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지만, 삶과 비전은 바뀐 게 별로 없다고 한다. ㄷ씨는 “피부로 느끼는 건 독립 장편을 만들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한국 영화 관계자들은 신인 감독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ㄷ씨는 최저임금 상승과 근로기준법 강화 등으로 영화 제작비가 늘어난 것도 신인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 힘든 환경 요인이라고 했다. 과거 30억~50억원 규모의 영화를 주로 신인 감독에게 맡겼는데 제작비 상승으로 80억원가량이 되면서 검증된 기성 감독에게 맡기거나 대중 취향에 맞춘 비슷비슷해 보이는 ‘기획 영화’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ㄷ씨는 “<플란다스의 개>처럼 대중적이지 않고 전형적이지 않아도 감독 시선이 독특한 영화가 있으면 ‘이런 영화도 해봅시다’가 돼야 하는데 시나리오를 들고 가면 ‘야 이거 못 팔아’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고 했다. ㄷ씨는 이어 “상업영화를 만들기 위해 회사에 들어가 회사 소속 작가와 같이 연쇄살인물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극한직업>이 잘되니 코미디로 바꾸라고 하더라”며 “한국영화계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이들은 몇십명에 불과하다. 그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대기업 투자 방식으로 흥행 공식을 따라가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게 영화계에도 구조화돼 있다”고 말했다.

ㄷ씨는 “요즘 영화계에서 많이 하는 말이 있다. ‘2000년대 초에 데뷔했어야 한다.’ 봉 감독이 데뷔한 시절에는 한국영화 제작비가 낮았고, 신생 중소제작자들이 콘텐츠로 승부해보자는 경쟁심리도 있었다”며 “봉준호·박찬욱·김지운·류승완, 모두 그때 나온 감독들이다. 문제는 지금도 그들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홍진 감독 말고는 뚜렷한 신인이 없다. 기획 영화가 아닌 작가 영화는 이들에게만 투자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하듯 영화계에서는 기형적 구조 개선을 제도화할 법령, 가칭 ‘포스트 봉준호법’을 국회에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진행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젊은 영화인들은 봉 감독의 성과가 주목받는 것에 대한 기대만큼 우려도 많았다. ㄷ씨는 “피겨계가 잘해서 김연아가 나온 것이 아닌데 <기생충> <벌새>가 잘됐다고 영화계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니다. 봉 감독, 김보라 감독 같은 초인적인 천재가 아니라도 좋은 신인 감독이 발굴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봉 감독의 성공이 조명받을수록 ‘현재 한국영화계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합리화될지 걱정스럽다”며 “독립영화 내에서도 이란·중국·태국 영화가 더 각광받는다. 독립영화부터 다양해지도록 지원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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