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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윤훈열의 공감과 소통] 시위 현장서 마주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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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출근길 청와대 앞을 매일 지나다닌다. 예전에는 청와대 앞길 통행을 규제했기 때문에 경복궁 쪽으로 우회해서 가야 했는데, 요즘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어서 참 편해졌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심야 개방도 이뤄져 청와대 가까이 사는 주민 입장에서 상당한 혜택을 누리게 된 것같이 느껴진다. 사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 이것이 마치 혜택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 권위주의 사회를 거치는 동안 우리 심성이 통제와 제약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청와대 앞을 지날라치면 2년 전부터 내란 혐의로 실형을 살고 있는 전 국회의원의 석방을 외치는 한 진보단체의 노숙 현장을 거쳐가야 한다. 이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은 '정권 타도'라는 플래카드를 써 붙여 놓고 이 추운 날씨에 풍찬노숙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몇 개월 전부터 한 보수단체도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탄핵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현직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렇게 서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매우 이질적일 것 같은 이 두 단체가 같은 장소에 나란히 있는데도 아무런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충돌은 고사하고, 가끔 서로 커피를 주고받는 모습도 보인다. 참 의아하고 낯선 모습이다. 사실 그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이웃이다. 서로의 친구들이고, 서로의 부모 형제일 수 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웃이지 응징하고 핍박해야 할 타도 대상이 아니다. 두 집단의 주장이나 형식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풍경에서 나는 좋은 의미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 사회의 따뜻한 변화다.

일견 생뚱맞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훈훈함으로 읽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근현대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응징해왔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고 죽이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그것이 생존으로 연결돼왔다. 국토가 분단되고, 참혹한 전쟁도 치렀다. 우리 안에서도 지역, 이념의 스펙트럼에 따라 갈등과 대립을 반복해왔다. 전쟁과 냉전을 겪은 우리는 이념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청와대 앞 시위 현장에서 진보단체와 보수단체가 공존하는 모습이 훈훈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다름'을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로 가는 작은 씨앗을 본 듯하다.

역사의 발전은 획일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가는 길을 따라왔다. 중국 송나라, 중세 아랍, 근대 유럽, 현대 미국 등 역사상 번영한 모든 국가나 사회는 문화·종교·사상의 다양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번영을 누려왔다. 반면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와 민족은 결국 발전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대한민국은 냉전 이후 최단 기간에 우리 힘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도 성숙시켜왔다. 이제는 '한류'의 물결이 세계 문화의 중심에서 큰 물줄기로 담대하게 흘러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전 세계인의 영화 축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기생충'이 다른 문화의 벽을 뛰어넘은 비결이 좋은 번역의 힘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 영화가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낸 이유를 생각해본다. 모든 사회의 공통 고민인 경제 격차를 다루면서도 이념이나 획일적인 선악 구도에 매몰되지 않은 시선이야말로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은 비결이 아닐까.

출근길 청와대 앞 시위 현장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다름'이 인정되고, 그 '다름'을 때로는 용광로처럼, 때로는 샐러드 볼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한국 사회를 꿈꿔본다.

[윤훈열 정동 동아시아 예술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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