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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 보면 ‘야만·문명’ 나눔은 착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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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전호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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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인간은 내면에 모순과 갈등, 충동이 가득 차 있어요. 이걸 극복하려고 싸우죠. 삶과 죽음 앞에서 늘 고민하고요. 그 과정에서 신앙이나 종교 역할이 커져요. 신앙이나 종교가 기득권이 되면 원시 종교의 이상은 사라지고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도 그래요. 기술 발달로 원시인과 현대인을 야만과 문명으로 나누지만 착각입니다. 본질로 들어가면 달라진 게 없어요.”

최근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창비)를 낸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말이다. 고대사를 전공한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암각화 전문가로 불린다. 두 분야가 우리 문화사 및 미술사의 주요한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1995년 아동용으로 쓴 첫 책 <고구려 나들이> 출간 뒤로 고분벽화와 한국 고대사를 주제로 30권 이상의 저술을 펴냈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2000)로 백상출판문화상(인문과학)도 받았다. 그는 2005년부터 여러 차례 국내·외에서 고구려와 고분벽화를 주제로 전시도 기획했다.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역 근처 카페에서 저자를 만났다.

저자는 실제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아들과의 가상 대화체로 구석기부터 삼국시대까지 옛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그 사유의 배경과 영향은 뭔지 차근차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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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까지 큰 여신이 하늘의 임금이었다면 청동기 시대에는 남신이 하늘을 차지한단다. 청동기 무기와 연장으로 땅 위에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해 전쟁을 일삼는 남신 시대가 된 것이다. 대신 큰 여신은 생산과 풍요를 담당하는 땅의 신이 된다. 정복자가 힘을 더 키운 철기 시대엔 인간의 권력관계가 훨씬 중요해지고 신의 뜻은 현실의 배경으로 물러선다고 했다. 삼국시대 이후로는 건국신화와 샤머니즘, 음양오행, 불교, 신선 신앙, 도교, 유교 순으로 고대의 생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서술은 일목요연하고 엄밀한 185개의 각주는 책이 깊이까지 더했음을 말한다. 저자가 90% 이상 찍었다는 정선된 도판 자료도 독서의 즐거움을 키운다.

이 책은 그가 4년 전 서울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 노트가 바탕이다. “후배 교수가 ‘한국의 고대 사상’ 강좌를 개설해놓고 연구 학기라 쉬게 되었다며 거의 막무가내로 맡겼죠.” 망설였지만 강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이렇단다. “저는 학문의 경계 위에 있어요. 무덤 벽화 연구가 전형적인 정신사이거든요. 고분벽화를 연구하려면 미술사, 종교, 역사, 고고학 분야의 공부를 다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편적인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어요. 오랫동안 생각한 걸 강의를 계기로 정리했죠.” 자신이 ‘전형적인 고증학자’와는 거리가 멀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학자라면 계절이 바뀌거나 꽃이 피는 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저는 달라요. 책 읽는 범위도 철학에서 생물학까지 넓어요. 지금도 웹툰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겨 봐요. 지금 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딸이 초등 1학년과 2학년 때는 제가 어린이 책을 만들어 어린이날 선물로 주기도 했죠. 두 아이가 어릴 때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같이 읽기도 했어요. 역사를 전공한 대학 동문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왔죠.”

현대인이 고대의 사유에 대해 혹 오해하고 있다면 뭔지 묻자 그는 “굉장히 많아요”라고 답했다. “고대인의 사유는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으로 계급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예컨대 도교는 인위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회복해야 평화와 안정이 이뤄진다고 했죠. 샤먼이 모시는 신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요. 불교도 내세는 현세와 달리 지위와 신분이 승계되지 않는다고 봤죠. 오늘날 종교에서 계급적 모순이나 계층 상승 욕구가 더 잘 보입니다.” 덧붙였다. “인간을 무리로 나눈 뒤 적의를 가지고 상대를 제압해 노예화하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게 청동기 시대였죠. 지금까지 이 흐름이 이어졌죠.”

현대인은 왜 고대의 사유에 대해 오해할까? “인간의 역사는 이성과 본능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늘 본능이 이겨요. 살아남기 유리해서죠. 역사도 본능이 남긴 기록입니다. 종교를 봐도 본능과 맞선 분들은 빠르게 제거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런 과정을 훨씬 쉽게 해주죠.” 그는 “승자가 남긴 기록 중에 생략된 부분을 찾는 게 역사학자의 일”이라고도 했다.

‘…동굴벽화에서 고대종교까지’ 출간

가상 대화체로 구석기~삼국시대 고찰

미술사·종교·역사·고고학 등 ‘융합’

“고대인 생각에 대한 오해 굉장히 많아”


국내 고구려 고분벽화 학계활동 2명뿐

“학문 분야별 칸막이 연구 풍토 탓”


그가 보기에 현대 문명의 속도와 기술은 인간을 근본적인 질문에서 더 멀어지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든 죽음이나, 어떻게 살지를 고민합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죠. 그러나 현대에는 이런 생각을 청소년기에만 해요. 현대 문명의 속도와 기술에 허덕이며 다 잊고 살죠. 환갑 즈음에 다시 인간은 뭔지 질문을 던집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울 수밖에 없죠.”

국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주제로 학계 활동을 하는 연구자는 그를 포함해 단 둘이란다. 그는 후학 가운데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자가 나오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북한도 예전에는 있었지만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단다.

이유는? “학문 세계의 칸을 쳐놓고 분과별로 연구하는 우리 학문 풍토 탓이 커요.”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려면 여러 학문 분야를 융합해야 하는데 우리 여건에선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수가 바뀌기 전에는 안 됩니다. 다들 내 과목만 지키려고 해요. (융합 지향적) 제도가 도입돼도 대학 현장에서 종종 왜곡되더군요. 옛 회화는 또 상징이나 기호적 요소가 있어요. 그림을 잘 보는 게 전제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학문 훈련 풍토로는 그게 쉽지 않아요.” ‘본능’의 문제도 있단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쉬운 연구로 가요. 신라 연구자는 계속 늘지만 고구려 연구자가 늘지 않는 이유입니다. 정치에서 ‘숟가락 얹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신라를 전공하면 기존 연구가 많아 그거 정리만 해도 논문이 다 됩니다. 고구려는 지금껏 박사 논문이 40편 정도에 불과해요. 벽화는 고구려 중에서도 특수 영역이라 참고할 논문이 더 없어요. 현실적으로 취직이 어렵기도 하고요.”

고분벽화를 연구 주제로 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중·고교 시절 이야기부터 했다. “중·고교 때 6년간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절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놓은 적이 없어요. 대학 가면 고고미술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79년 재수로 서울대 인문대를 들어가 2학년 때 과를 정하는데 고고미술사 전공 학생이 몇 명 안 되더군요. 수가 너무 적은 게 걸려 국사학과로 갔죠. 고고미술사는 부전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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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벽화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은 123기다. 이 가운데 약 40기는 벽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란다. 그가 눈으로 직접 본 고분벽화는 중국 5기, 북한 7기 해서 모두 12기다. 북한은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 찾았단다.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예술적 위상을 이렇게 말했다. “5~7세기만 보면 세계 최고이죠. 그 시절 인도·유럽 지역은 기존 고대문화를 파괴하고 새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죠. 수도원 문화 정도죠. 이슬람 지역도 이슬람 운동을 하느라 기존 문화를 없애고 있었어요. 그 시절 고구려에 필적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 밖에 없었어요. 중국과 고구려 벽화는 패턴이나 주제를 공유했지만 다른 점도 있어요. 중국 작품은 굉장히 인간적이죠. 종교적 존재를 그리더라도 인간적으로 그려요. 신비 자체가 신비로 남지 않게 특유의 인간주의적 방식으로 그려요. 반면 고구려는 신비는 신비 그대로 들어갑니다. 사신도 벽화가 전형적이죠. 강서대묘 고분벽화는 어디서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는 재작년 ‘유일한 벗’이었던 아내를 떠나보냈다. 상실감을 추스르기 위해 지난해부터 서예 공부를 시작하고 최근엔 전각도 배우고 있단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1시간 30분 동안 성경을 한 쪽씩 필사하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와, 내 상념과 아이디어를 기록하죠. 이렇게 쓴 다이어리가 10권 정도 있어요. 스토리 텔링 형태로 쓸 책 30권의 초안도 각각 30매씩 써놓았죠.”

그는 ‘경계 위의 학자’여서 도움이 되는 점도 있다고 했다. “제 출발점인 역사학계도 그렇고 어느 분야에서도 저를 잘 부르지 않아 오히려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죠. 제가 쓴 글은 중국에서 열심히 번역해요. 일본 학자들도 열심히 읽더군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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