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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ESC] 무뚝뚝한 청년의 울음, 다시 쓴 8층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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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설거지2]

투병 생활 했던 병원 찾아간 이야기

일상 복귀 후 쏟아지는 상담 메시지

한 청년 암 투병 중인 어머니 면회 부탁

고심 끝에 갔더니 진짜 가족 풍경 목격

마음 충만하게 만드는 경험은 소중

“어머니 완쾌 기다리겠습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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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8층을 눌렀다. 익숙한 버튼이다. 이 버튼의 중앙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돌기가 있다. 플라스틱 사출 흔적인지 뭔가가 묻어 오랜 시간 굳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거기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망설이다 보면 반드시 저 돌기와 만나게 된다.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로 가만히 있기도 하고 손톱 끝으로 튕겨보기도 한다. 그렇게 누르기를 수없이 주저하다 눌렀던 버튼이다. 가고 싶지 않은 곳. 병원 별관 8층 병동. 내가 도대체 여길 왜 다시 왔을까.

투병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몸이 아픈 사람이 절반, 마음이 아픈 사람이 절반이었다. 처음에는 답장을 보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주말을 이용해 아침 아홉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꼬박 답장을 보낸 날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에 오백개가 넘어가면서 포기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항암을 끝내고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 이후로 단 한 번도 재발에 대해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발과 죽음에 관한 수천가지 이야기를 읽다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겁이 났다.

일일이 답장을 쓰기보다 내 이야기가 꼭 필요한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서함을 만들었다. 대화가 절실한 누군가가 사서함에 이야기를 남긴다. 의외로 그냥 말하고 싶었다며 이야기를 남기는 행동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그걸 듣고 때로 내 생각을 들려준다. 통화를 하기도 한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다. 사서함 대화를 하다 보니 반드시 이루고 싶은 어떤 꿈이 생겼다. 나 같은 이십대를 보내는 청년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꿈으로 어렴풋이 남겨두기보다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름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된다.

사서함에 녹음된 이야기를 듣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청년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한다. 내가 앓았던 림프암이다. 투병한 지 2년째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에 내가 다녔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꼭 병문안을 와달라는 사연이었다.

난감했다.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 병동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재발하면 어차피 치료 안 받을 거니까 병동에 돌아갈 일은 내 삶에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게 어머니 부탁인지, 아니면 그냥 아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의사로부터 당신은 죽는다는 말을 들은 말기 암 환자에게 내 병문안이 어떤 효용을 가질 것이며 무엇보다 그걸 원할지 모르겠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싫었을 것 같은데.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사연을 남긴 청년과 이야기를 더 해보았다. 그는 삼십대고 어머니는 오십대다. 아. 어머니가 너무 젊었다. 아들은 지방에서 직장을 다닌다.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병문안 가는 것을 원하시는지 어머니에게 여쭈어보는 게 먼저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만약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병동에 내가 누워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주사 못 놓는 인턴 청년이 와서 내 팔에 바늘을 다섯번 꽂다가 결국 사타구니 왼쪽 동맥에 여섯 번째 주사를 찔러 넣고 그마저 실패해서 마침내 오른쪽 동맥에서 피를 뽑아갔다. 그러고 나면 사람이 물에 젖은 갱지처럼 너덜너덜해진다. 그래서 이불 위에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이불 위에 묻은 얼룩 같은 것이 된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 꿈에서 깨고 난 이후에도 다시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반드시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만 한다.

어머니가 너무 기뻐하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가기로 결정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아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면회가 금지되었다. 한 주를 더 보내고 나서야 아들을 만났다. 사연을 보낸 청년뿐만 아니라 동생과 아버지도 함께 와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병문안은 한 번에 한명씩만 가능했다. 혼자 들어가기로 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경우 추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병원 출입문에서부터 신원과 연락처를 남겨야 했다. 연락처를 남기고 방문 목적에 ‘환자 면회’를 적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밤을 이 병원에서 보냈지만, 정작 누군가를 병문안하기 위해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별관 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섰다. 별관 1층과 2층은 불이 꺼져있다. 주말이기 때문이다. 주말의 이 적막함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이 났다. 링거를 끌고 다니며 접수대 앞의 의자에 불량하게 걸터앉아서 책을 읽고는 했다. 그즈음에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건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였다. 마침내 8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그리고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아 그러니까 그게, 음, 아는 동생 어머니요.” “모르는 사람 면회 오신 거예요?” “그렇게 됐네요.”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와 대화를 마치자 병실 복도로 통하는 밀폐문이 열렸다. 나는 내가 누워있었던 병실과 내가 갇혀있었던 무균실을 지나쳐서 어머니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최은희(가명) 어머니. 내가 찾는 어머니의 이름은 최은희였다. 나를 보고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기뻤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머리에 비니를 눌러쓰고 계시지만, 하얗게 예뻤다.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따위의 말은 좀 조심해서 했으면 좋겠고 환자는 아무리 미궁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고 답답해도 다른 길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병원과 의료진이 시키는 대로만 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꼭 잡는데 힘이 느껴져서 좋았다. 면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시켜서 엄지손가락도 올리고 포즈를 취했는데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몇 년 전에 이혼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동생을 맡고 있고 사연을 보낸 형은 직장을 다니며 어머니를 살핀다. 그렇게 남이 되어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암에 걸린 이후로는 아버지가 찾아와서 돌보기도 하고 이렇게 병문안을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의 신화에 대해 믿지 않는 편이다.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무마되어 버리는 수많은 것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망치면 망쳤지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이 가족의 사정 앞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렇다. 나는 이런 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재물을 쌓아 올려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수해내는, 혹은 재물 그 자체를 위한 인프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지리멸렬한 평생의 과정이 가족의 본령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의리 말이다. 아, 한국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저평가되어있는가.

가족이 혈연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나는 가족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나는 해체된 상태로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하게 하루를 섞은 이 가족이 부럽고 기뻤다. 귀하게 느껴졌다. 8층 버튼 앞에서 머뭇거렸던 손가락의 감각은 잊혔다. 그런 경험들이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격정적이며 값비싼 것보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방향감각이 생기고 등이 곧게 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년이었을 때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발병한 이후 처음으로 수치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 최은희 어머니의 완쾌를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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