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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윤성현 감독, 청춘이라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 [김노을의 디렉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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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닷컴 MK스포츠 김노을 기자

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자,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편집자주>

윤성현 감독은 첫 장편영화 ‘파수꾼’(2011)으로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비롯해 제48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 제32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러닝타임 32분의 ‘아이들’(2008)에서 시작해 ‘파수꾼’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세계관은 이후 숱하게 등장한 청춘 소재 한국 영화들이 제2의 ‘파수꾼’이라는 수식어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비선형 내러티브로 이뤄진 ‘파수꾼’에 담긴 청춘들의 고통은 성장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흔한 성장 영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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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현 감독 사진=김영구 기자


◇ 파국으로 치닫는 10대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파수꾼’

‘파수꾼’에는 10대 소년들 간의 위계와 조직성,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과 질투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한 소년이 죽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고 뒤늦은 죄책감과 무력함에 사로잡힌 채 아들의 죽음을 되짚는다. 아들의 서랍에서 발견된 사진에는 두 친구가 있다. 한 명은 전학을 갔고, 한 명은 아들의 빈소를 찾지도 않았다니 영 석연찮다.

여기까지만 해도 영화는 평범해 보인다. 관객들은 직접 경험하거나 간접 체험한, 그것도 아니라면 어디선가 주워들은 일화들을 대입해 세 아이의 과거를 추측하게 된다. 이야기의 포문을 연 소년의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은 오프닝 이후 채 20분도 되지 않는 시점에 보기 좋게 배반당한다. 시간순으로 제시되는 줄 알았던 이야기는 사실 비선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죽은 소년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일 거라는 추측도 이내 믿을 게 못된다. 보는 이들은 누가, 어떻게, 왜의 질문에 봉착하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 유일한 감정 이입의 대상이던 아버지도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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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스틸컷 사진=필라멘트픽쳐스


‘파수꾼’ 속 인물들은 가장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일을 겪는다. 표면적으로는 10대 성장 영화처럼 보일 수 있으나 러닝타임이 살을 깎아갈수록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 혹은 청춘들이 으레 겪고 아파할 법한 사건을 통해 누군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당위성을 갖지도 않는다.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격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겪는 청춘들이 지나는 터널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가족이나 유사 가족,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 성장하는 성장물을 기대하고 ‘파수꾼’을 봤다간 큰 코 다치는 이유다.

이 영화는 드라마 장르로 분류되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에 따른 미스터리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죽음’을 다루는 미스터리 장르에 기반한 흥미로운 다중 플롯을 통해 과거 발생한 사건들을 재구성하게 만드는 데에서 오는 힘이 상당하다. 화자의 변화도 눈여겨 볼 점이다. 처음에는 죽은 소년의 아버지, 그 다음부터 차례대로 소년과 가까웠던 것 같은 두 아이가 화자로 자리한다. 이때 죽음에 얽힌 사실과 정보가 적재적소에 노출되거나 감춰지고 선결과 후원인의 모양새로 제시된다. 비단 인물의 감정선에만 모든 걸 기대지 않는, 장르적인 매력이 흡인력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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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냥의 시간’ 포스터 사진=리틀빅픽처스


◇ 디스토피아와 ‘사냥의 시간’

무려 10년 만이다. ‘파수꾼’으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제시한 윤성현 감독이 상업영화 ‘사냥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오는 26일 개봉 예정인 ‘사냥의 시간’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위험한 작전을 계획한 네 친구들과 이를 뒤쫓는 정체불명의 추격자간 숨 막히는 사냥의 시간을 담아낸 추격 스릴러다.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 부문에 초청됐다.

‘파수꾼’에서 호흡을 맞춘 이제훈과 박정민은 이번 영화를 통해 윤성현 감독과 재회했다. 여기에 최우식, 안재홍, 박해수가 가세했다. 배경은 경제 붕괴로 폐허가 된 한국의 디스토피아. 무리의 중심인 준석(이제훈 분)은 갓 감옥에서 출소했고, 친구 장호(안재홍 분)와 기훈(최우식 분), 상수(박정민 분)가 위험한 범죄 작전을 준비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당대 청춘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이 담긴다는 측면은 ‘파수꾼’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윤성현 감독은 진정 ‘영화적’으로 불리는 영화에 갈증이 있었던 듯하다. 내러티브에 모든 걸 내주지 않고 시네마틱한 것을 원한 듯 영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 등 직선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인 작품을 언급하며 ‘사냥의 시간’을 설명했다. 그는 최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하위문화가 포함된 디스토피아로, 빈민가에서부터 생기는 문화를 많이 차용했다. 다른 영역의 영화적 재미를 주는 영화를 좋아했고, ‘파수꾼’과 반대 진영에 있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한국영화를 보면 내러티브에서 오는 부분이 많은데, ‘새롭다’라는 표현은 조심스럽고 다른 방향성을 가고 싶었다”고 밝혔다.

시각과 음향을 포함, 시네마틱하게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를 희망한 윤성현 감독이 ‘사냥의 시간’으로 그려낸 한국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모인다. sunset@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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