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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예술과 과학 사이…새로운 美學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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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네리 옥스먼 MIT 미디어랩 교수의 2008년작 `야수(beast)`. 가로 방향으로 눕힐 수도 있고 세로 방향으로 세울 수도 있다. 굴곡 그 자체가 외형을 이루는데, 자세히 보면 여성의 신체를 표현했다. 그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주로 CT스캔과 3D프린터를 이용한다. [사진 제공 = 문학동네·네리 옥스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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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오랜 질문 가운데 이런 난제가 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원자(atom) 수준까지 복제한 위작이 존재한다면 원작과 위작은 구분될 수 있는가.'

진품이 간직하는 시간만이 원작의 절대 조건이라는 전제를 세운다면 이 물음은 우문이다. 가는 붓칠과 세월의 먼지까지 재현한 '모나리자' 위작과 500년 전 다빈치의 숨결이 어딘가에 밴 '모나리자'가 같을 수는 없어서다. 그러나 저 질문은 초보적인 구별의 단계에 멈추지 않는다.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관람객 시선으로 눈을 돌린 뒤 예술이라는 장르의 조건을 관람객에게 끼치는 영향 혹은 감흥으로 변경한다면 답이 쉽지 않아서다. 원작이든 위작이든 관람객이 똑같은 느낌을 얻는다면 구분은 무의미하다. 딜레마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는 이런 질문조차 무의미한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원작이라는 관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해서다. 전통회화나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현대예술의 원작이라는 주장은 삭제된다. 예술과 과학의 접점에서 새 미적 세계가 열렸음을 주장하는 선언서가 출간됐다. 캔버스와 붓으로 그린 미술관의 작품은 진부한 과거 일이며 동시대의 예술가는 공학자, 연구자, 기술자 지위를 획득했음을 분석하는 책이다.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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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미디어랩에는 네리 옥스먼이란 이름의 1976년생 교수가 있다. 배우 브래드 피트와의 열애설로도 유명했던 디자이너인데, 그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기하학의 뜻이 궁금해진다. 작품 '메두사1'은 목 잘린 메두사에게서 영감을 받은 헬멧 디자인이고 작품 '야수(Beast)'는 다수 방향으로 눕힌 중의적 외형이다. 외피 굴곡만으로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옥스먼 작품은 대다수가 CT스캔이나 3D프린터로 제작됐다. 뇌우처럼 들이닥친 천부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예술을 영위하기는커녕 철두철미한 설계의 결과물이란 얘기다.

직관을 버린 예술이 과학을 택한 원년을 저자는 1966년으로 본다. 선글라스를 쓴 앤디 워홀이 "이건 정말 멋지군"이라고 말하며 입장한 기획전 '아홉 개의 밤: 연극과 공학'이었다. 예술인 10명, 공학자 30명이 참여한 행사에서 안테나가 무용수 몸에 반응해 소리를 만드는 등의 작품은 옛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의 어떤 계보에도 없던 '사건'이었다. 문전성시를 이룬 행사장의 관객 1만명은 "눈앞의 이 모든 것들이 주류 예술계의 정중앙을 강타할 새로운 예술"이라고 확신했다. 과학을 도구 삼아 전위를 표현하는 깜짝 놀랄 예술의 출현이었다.

맨해튼의 허름한 골목에서 열린 행사 이후로, 예술은 과학과 충돌하며 충격적인 오브제를 만들어냈다.

예술가 킷 갤러웨이와 셰리 라비노비츠 두 명의 미디어아트 작품 '공간의 구멍'은 기술 집약적이다. 1980년 11월 어느 날, 뉴욕 링컨센터를 지나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대한 화면 속 행인들에게 매료됐다. '도대체 어디냐'고 물어보자 저들은 대답했다. "로스앤젤레스요!" 시차를 무시한 작품에 관중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스스로 작품의 일부를 자처했다. 공간을 초월하는 현재성의 근거는 바로 기술이었다. 스텔락의 '늘어난 피부'는 남성의 얼굴을 평평하게 늘려놓은 거대한 디지털 자화상으로 정교한 복제 기술이 작품의 원천이었다. 흰색 토끼에 형광 녹색 단백질 유전자를 삽입한 카츠의 작품 '알바(Alba)', 눈에서 꺼낸 먼지 한 점을 찍어 확대한 마이크 필립스의 '티끌'도 인간 오감으로는 재현 불가능한 기술을 사용한 예술이다.

일상이라는 삼차원에 공간이라는 네 번째 차원을 추가한 큐비즘의 선구자 피카소의 1907년 행보에서 저자는 예술과 과학이 만나는 접점의 태초적 은유를 발견해낸다.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이론을 제거하면서 '절대'라는 관점 자체를 거부해 인류의 혁명적 발견을 이뤄낸 1905년 상대성이론의 주인공 아인슈타인 역시 저자의 미학적 관심사다. 과학과 기술의 영향을 받은 예술을 아트사이(artsci) 혹은 사이아트(sciart)로 부르자는 제안은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현미경에서 망원경으로 렌즈를 바꾸면 21세기는 원작과 위작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진 시대다. 인류는 실체 없는 관념만으로 인간 삶을 설명해내기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원작과 위작의 경계를 넘어 바야흐로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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