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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책과 삶]‘출구 없는 지하실’ 같은 빈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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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지음

문학동네|284쪽|1만3500원

경향신문

소설가 권여선이 여섯번째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을 펴냈다. 스물한 살 스포츠용품 판매원부터 레즈비언 할머니까지, 절망과 고통 속에 소외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도 반짝이는 햇살과 같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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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희에겐 다 계획이 있다.”

소설가 권여선(55)의 여섯 번째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의 단편 ‘손톱’의 주인공 스물한 살 소희에겐 ‘계획’이 있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언니의 저금 700만원과 언니 이름으로 대출받은 1000만원을 들고 내뺐고, 얼마 전 함께 살던 언니가 어머니와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들고 내빼버린 ‘답’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대출받은 옥탑방 보증금, 이자가 제일 센 그 500만원부터 갚아야 한다. 7월부터 11월까지 소희는 매월 20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만들어놓았다. 이번달에 30만원을 보태면….”

하지만 소희의 계획은 금세 어그러진다. 보증금이 오르거나 월세가 오르면 빚 갚는 건 그만큼 늦어진다. 주인이 월세나 보증금을 얼마나 올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계산할 수 없다. 언제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

영화 <기생충>의 기택네 가족의 ‘계획’이 실패했듯이, 빈자의 계획과 셈법으로는 이 세상의 격차를 도저히 메울 수 없다. 소희는 화·수·목요일은 10시간 일하고 금·토·일요일은 13시간 일한다. 매운 짬뽕 곱빼기가 6000원이란 말에 “곱빼기도 말고 맵게도 말고 그냥 4500원짜리 짬뽕을 먹을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서 라면을 끓인다. 수신료를 안 내기 위해 텔레비전도 치우고, 피곤에 지쳐 잠들기 전까지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포인트와 할인 쿠폰을 모은다. 소희의 삶은 이쯤 되면 ‘출구 없는 지하실’과 같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도 갚을 수 없는 빚더미,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분노는 안에서 펄펄 끓다가 손톱으로 터져나온다.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박스를 정리하다 굵은 고정쇠에 오른손 엄지손톱을 찔려 손톱이 뒤로 꺾이고 살이 찢겼다. 치료도 제때 받지 않고 방치하다 혹이 생기고 덧나자 뒤늦게 병원을 찾지만, 치료비 7만원을 내고 소희는 절망한다. “손톱 없어도 된다. 엄마 없이도 살았고 언니 없이도 사는데 그깟 손톱 없어도 된다”며 거즈를 떼어내 버린다.

경향신문

책을 따라 읽는 독자의 마음마저 먹먹하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소희의 삶의 유일한 위안처는 지하철에서 봤던 반짝이는 햇살이다. 그리고 대형 휴대폰 매장 AS센터에서 무료로 인터넷도 하고 사탕도 까먹는 소희에게 더 ‘고수’로 보이는 할머니가 건넨 “조심해야지”란 말이다.

‘너머’에선 학교 비정규직과 요양원 간병인을 통해 ‘비정규직의 지형학’을 정밀하게 그려보인다. 정교사가 낸 두 달짜리 병가를 대신해 기간제 교사로 일하게 된 N에게 학교는 낯설기만 하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친절히 알려주고, 누군가는 퉁명스럽게 대꾸하지 않는다. 식당의 급식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바뀌면서 이들은 식당 이전을 요구하고, 이를 계기로 학교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무수한 가름선이 선명히 드러난다. “복잡해 보이는 사태도 정규와 비정규를 가르는 경계만 알면 대부분 참으로 간단히도 이해가 되었다.” N이 학교 안에서 두 달짜리 기간제 교사로 비정규직 계급의 맨 아래에 있다면,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 또한 그렇다. 건물 8~10층에 입주한 요양원 간병인의 ‘수준’은 층수에 따라 올라간다. 8층은 8인실, 9층은 4인실과 6인실, 10층은 2인실과 특실이 있기 때문이다. 8층에 있는 어머니를 돌보는 간병인은 ‘일용잡급직’의 초짜 간병인이다. N이 학교에서 돌아가는 일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고, 각종 정보에서 소외될 때, 어머니는 간병인의 불성실함 때문에 욕창으로 피부가 잔뜩 헌다. “우리가 가난뱅이니까 우리 부모도 가난뱅이 병실에 있는 거”라는 말이 ‘저주’처럼 다가온다. N은 교장의 계약 연장 제안에 “치사하고 악질적인 쪼개기 계약과 계약 연장 꼼수”라며 거절하려다가도, “한 달 치 월급과 그 돈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놓고 고민하다 “잡급직들은 잡급직답게 잡스러워야 한다”고 되뇐다.

권여선은 전작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서 세상 끄트머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슬픔을 주정뱅이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며 ‘주류(酒類) 문학’을 선보였단 평을 들었다. 이번 소설집에선 알코올 기운을 싹 걷어내고 가난하고 소외된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의 현실과 아픔을 처절하고도 정확하게 드러낸다. ‘희박한 마음’에선 레즈비언 할머니 대런이 동거인의 죽음 뒤에 홀로 살며 잊히지 않는 기억을 반복해서 곱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기억의 실체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대학 시절 함께 담배를 피우던 이들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뺨을 때리던 남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안경을 썼지만 얼굴은 흐릿한 ‘남성’의 모습은 반복해서 혐오와 폭력의 다른 형태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수록된 소설이 분노와 슬픔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실을 적나라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면서도, “아직 멀었다”는 말에 위안을 얻고, “순간이야”라며 삶의 부조리를 위로한다. ‘찌르는 듯 따스하고 무심하면서도 공평한 햇빛’의 온기가 담겨 있다.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김애란의 추천사처럼 말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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