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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 (목)

[박종호의 문화一流] 祖國 잃은 사업가, 평생 모은 '세계 최고 컬렉션' 인류에 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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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系 사업가 굴벤키안, 同族 대량 학살당하자 해외 망명

재벌 아닌 '균형', 강대국 대신 '모두' 추구… 수집·자선으로 이어져

말년에 모든 수집품·재단 기증… 누구보다 아들들이 열렬히 박수

조선일보

박종호 풍월당 대표


누구나 어려서 수집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있지 않을까? 딱지와 구슬에서 시작하여 우표와 동전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예술품으로 발전하는 사람도 있다. 예술은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비자는 예술을 지키는 중요한 사람이다. 수집으로 시작한 것이 사회적 기여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여기 한 사람의 뜨거운 수집가를 소개한다.

포르투갈 리스본은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다. 여기 와서 빠뜨리면 아쉬운 곳이 굴벤키안 박물관이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1869~1955)이 평생 수집한 6000여 점의 수집품이 보관되어 있고, 그중에서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유럽, 중동, 동아시아를 망라하여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고대의 구슬부터 현대의 최고 명화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작품을 포함한다. 이 컬렉션은 개인 컬렉션 가운데서도 세계 최고의 것으로 평가된다.

아르메니아 血統… 석유 사업으로 거부 축적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굴벤키안의 아버지는 코카서스 지역에 방대한 석유 채굴권을 가진 귀족이었다. 영국에 유학하여 화학공학을 공부한 그는 아르메니아로 돌아가 중앙아시아 일대의 석유 매장량을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러던 1895년에 오스만튀르크 정부가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하자, 굴벤키안 가족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26세 젊은이였던 굴벤키안은 그때부터 석유 사업에 뛰어든다. 굴벤키안은 지역 조사를 해둔 것을 바탕으로 영국 및 러시아의 석유 사업에 투자하고, 터키와 손잡고 메소포타미아에 정유 회사를 세운다. 오스만제국이 무너지자 회사는 이라크 정부의 소유가 되지만, 중동 일대에 걸친 굴벤키안의 지분은 계속된다. 그는 여러 정유 회사로부터 수익의 5퍼센트를 받아 '미스터 5퍼센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굴벤키안은 석유 재벌보다는 균형을 추구하는 사업가를 자처하였다. 그의 '균형'이라는 개념은 강대국의 논리에 편승하지 않고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기업 자세를 뜻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수집과 자선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조선일보

①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굴벤키안 박물관에는 아르메니아 출신 석유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이 평생 모은 뒤 기증한 6000여점의 수집품이 보관돼 있고, 이 중 10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개인 컬렉션 중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②20세기 초 30대였던 굴벤키안의 모습 ③1952년 결혼 60주년을 맞은 굴벤키안(앞줄 왼쪽) 부부와 가족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굴벤키안 재단·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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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골동품 가게를 돌며 모은 동전으로 시작한 굴벤키안의 수집품은 만년에 6000여 점에 이르게 된다. 유럽이나 아시아 한편에서만 살지 않고 대륙을 넘나들며 성장하고 사업했던 삶을 여실히 보여주듯 그의 수집품은 지역과 시대를 아우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수집품을 런던으로 옮기고 나중에는 뉴욕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수집품들은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만년에 굴벤키안은 그것들을 한곳에 모으려고 했다. 긴 외교적 노력 끝에 비로소 한자리에 모인 수집품을 보관하기 위해, 조국이 없어진 그가 선택한 곳은 리스본이었다. 젊은 시절 리스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 굴벤키안은 이곳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씨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시민들이 사는 리스본을 제2의 고향으로 정하고, 생애 마지막 13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박물관·미술관·도서관·음악당… "작은 민족·문화도 중요하다" 메시지

리스본 시내의 굴벤키안 박물관은 숲과 같은 거대한 정원에 여러 건물이 있는 하나의 '캠퍼스'다. 박물관과 굴벤키안 재단 외에도 현대미술센터, 미술도서관, 연구소, 음악당, 야외 공연장 등이 있다. 개방된 캠퍼스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거나 벤치에서 독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굴벤키안은 죽기 전에 재단과 모든 소장품을 리스본 시민에게 기증하였다. 그가 기부할 때 그의 아들들이 누구보다도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957년에 박물관은 문을 열었다.

굴벤키안 재단은 문화에 대한 지식을 알리기에 앞서, 민족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세상에는 주류가 되는 강대국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작은 민족과 잊힌 문화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또한 재단은 굴벤키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시민들을 위한 콘서트와 오페라를 여는데, 대부분이 무료거나 아주 저렴하게 제공한다. 굴벤키안은 고향 아르메니아와 중동 일대에도 학교와 병원을 비롯하여 문화, 교육, 연구 시설을 지었다.

부자가 많은 미술품을 소유하는 것이 박수를 받을 일은 아니다. 창작자에게는 좋은 고객이 될 수 있겠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서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유럽의 제후들은 궁전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수집품을 공개해서 대중이 즐길 수 있게끔 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유럽에서 만나는 박물관들이다. 그 이후로 개인이 수집품을 자랑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일이 되었다.

리스본에 갈 때마다 굴벤키안 박물관을 찾는다. 그곳을 나설 때면 감동과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다. 한 사람이 이룬 대단한 컬렉션을 보며 그가 이룬 부에 놀란다면 조금만 느낀 것이고, 동서양 문화에 대한 그의 방대한 지식과 깊은 애정에 놀란다면 좀 더 많이 느낀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부자가 평생 공들여 이룬 이토록 대단한 선물을 불특정한 대중에게 남길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야말로 진정으로 느낀 것이 아닐까. 굴벤키안은 평생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여러 민족과 국가와 문화의 경계에서 살았던 굴벤키안은 나라 없는 민족, 소수민족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동등하게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였다. 아르메니아는 굴벤키안 사후 35년 뒤인 1990년에 독립해 나라를 되찾았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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