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5 (일)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7)‘캐릭터에서 데이터로’ 에반게리온 덕후도 BTS 팬처럼 놀아보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와 그 함정

경향신문

1995년 방영된 일본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싸우는 거대 병기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파일럿이 된 소년 이카리 신지(오른쪽)의 이야기를 그린 로봇물로, 팬들은 피규어 제작 등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하는 새로운 소비행태를 보였다. 장면 속에 합성된 ‘파란 머리, 흰 피부’ 등 아야나미 레이(왼쪽)의 특성을 담은 코스플레이(왼쪽에서 세번째) 같은 모습들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화는 큰 이야기의 쇠퇴를 의미한다.” 일본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1971~)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한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 “큰 이야기의 쇠퇴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이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현실인식은 ‘거대담론’을 없애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전의 ‘작은 이야기’들은 그 밑에 있는 ‘큰 이야기’에 기생하고 있었다. 소설로 치자면 각 장의 이야기들은 주제와 관련지어 이해되었고, 건축으로 치자면 인테리어 소품들이 건물 전체와 연결되어 의미를 가졌다. 뭐, 시위로 치자면 각 요구사항은 지켜지는 둥 마는 둥 하나의 폼 나는 구호로 수렴되면 그뿐이었다. 이래저래 평범한 사람들은 ‘큰 이야기’에 주눅 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큰 이야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어느덧 대세다.

■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건담 팬들, 허구의 이야기 탐구…에반게리온 팬들은 피규어 제작 등 또 다른 창작 몰입

2000년대 이후 오타쿠 문화서 큰 이야기는 사라지고 데이터베이스로 대체


서양에서는 포스트모던 이후로 구호, 이데올로기, 주제, 거대담론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주된 까닭은 경제, 군사, 외교, 정치판에서 ‘큰 이야기’가 강요되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79년 시작된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와 1995년에 방송 개시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있어 그 팬들의 소비 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건담’의 팬들은 허구의 이야기를 열심히 탐구했던 반면, ‘에반게리온’의 팬들은 캐릭터들을 소재로 또 다른 창작이나 등장인물의 피규어 제작 등에 몰입하는 편이었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오타쿠계 문화에서 ‘큰 이야기’가 사라지고 ‘데이터베이스’로 대체되어 소비된 것이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게임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게임에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게임 오버’되더라도 ‘리셋’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와 연결시킨 옵션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 캐릭터만 있다면 심지어 몇 번이고 죽더라도 리셋과 함께 처음부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잡다한 게임의 스토리보다는 캐릭터들이 기억의 저변에 자리 잡는다.

각각의 캐릭터가 있고 ‘말수 적음, 파란 머리, 흰 피부, 신비한 능력’처럼 캐릭터의 특성이 있다. 이것들이 모여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이것을 새롭게 구성해 ‘데이터베이스 소비’가 된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대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캐릭터와 그 배치에 대한 관심으로, 또한 창작자 주도형에서 소비자 주도형으로, 그뿐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세대에서 시스템을 좋아하는 세대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케팅 분야에서 한참 ‘큰 이야기’가 강조되었다. 이 상품을 구입하면 그 수익의 얼마가 오지의 아이들에게 돌아간다느니, 재생원료를 사용해서 지구 환경을 생각한다느니 하는 광고카피가 먹혀들었다. 상품을 홍보할 때 의미를 던져주는 스토리를 덧입히면 분명히 판매량에 영향을 미쳤다. 고객들은 이런 문구를 통해 그 브랜드의 세계관을 보고 상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 가운데는 문자로 기록된 미디어에 비해 이미지가 많은 만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판타지 소설이나 마블 시리즈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있다. 이런 세대는 영화나 사진, 그림, 만화, 비디오를 무시하고 오로지 책만 강요한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세대는 이미 그런 소비를 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데이터베이스 소비’ 세대에게 ‘큰 이야기’를 강조하는 세대는 ‘음모론’까지 퍼뜨리며 거대담론을 수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한물갔다.

■ 데이터베이스의 함정

데이터베이스 잘 작동되는 검색엔진…업체들, 사용자가 남긴 정보 팔아 ‘사유화’

폐쇄적 네트워크의 문제점, 거대담론이 지배했던 시대의 작동원리와 다르지 않아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유감없이 작동되는 곳은 검색엔진이다.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특정 웹페이지로 접속시키는 검색엔진은 그 웹페이지의 저작권을 소유하지 않았다. 접속만 시킬 뿐인데도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검색을 유발시키며, 검색이 많으면 광고를 더 많이 노출시킬 수 있다. 당연히 검색엔진을 제공하는 업체들은 광고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더 많은 정보 데이터를 얻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사용자가 검색을 위해 링크된 사이트에 막상 접속하면 원치 않는 광고로 홍역을 치를 때가 많다.

우리는 검색 외에도 특정 단어나 이미지, 음악 소스를 사용할 때, 계좌에서 입출금이나 이체를 할 때 특정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전화번호 주소록, 수첩에 적어 놓은 기록들 또한 그렇고 도표나 명단을 파일로 만들어 검색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다. 우리는 특정 업체의 데이터베이스에 신상이 담긴 정보를 올리고 우리가 방문한 웹페이지와 검색어, 온라인 쇼핑 정보, 위치 정보까지 남긴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문자, 전화통화 내용 등 사용한 정보들이 데이터베이스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데이터 입력이 잘못돼 오류가 있거나 관리 부실로 데이터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특히 데이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데이터 오류로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구나 저장된 데이터는 사용자나 데이터베이스를 갖춘 회사의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데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이 정보는 광고주와 마케터에게 매년 헐값에 팔려 활용되거나 간혹 불법으로 개인정보가 판매되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이 정보 공유, 소셜미디어 시대를 열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그 접속에서 얻게 된 이윤은 대부분 사유화되고 독점되어 갔다. 온라인상에서 편리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마땅한 권리마저 포기한 듯 살아간다.

중앙통제 및 해킹, 데이터 유출 등은 폐쇄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수직형 데이터베이스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다. 이것은 교리나 이데올로기, 세계관과 같은 거대담론이 지배하던 시대의 작동원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문제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팬들처럼 표면적으로는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더라도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데이터베이스든지 그 안에 과잉의 정보가 있기 마련이고 이윤을 남기기에 급급한 서비스 제공업체들의 방식을 무턱대고 따라가다 보면 사용자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하며, 우리의 신상 정보는 보호되어야 한다.

경향신문

일본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아즈마 히로키 “포스트모던화는 큰 이야기의 쇠퇴 의미, 사람들의 현실인식 다양해졌다는 것”


■ ‘놀이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자!

건전한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위해서는 사용자가 데이터를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과 주체성이 필요하다. 다행히 ‘웹3.0’을 통해 이런 시스템이 하나둘 현실화하고 있다. 사용자는 서비스 제공자가 구성해 놓은 방식을 무턱대고 따르는 대신 주도적으로 정보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이머들도 캐릭터들과 그 속성들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문학 등의 창작자들은 한 사람의 시점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시점으로 사건을 묘사해 일방적 세계관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는다. 원작자는 데이터베이스 안에 축적된 캐릭터와 그 특성들을 사용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마음껏 활용하도록 함으로써 원작의 성격이나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갖 이야기를 구성토록 하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사용자의 주체성이다.

건전한 데이터베이스 소비 위해 ‘BTS 팬’처럼 주체성 필요

기획사가 만든 비디오·웹툰·도서·이모지 등 창작자 뜻과 무관한 해석 담아 마음껏 즐겨


사용자의 주도적인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한 예로 ‘BTS 현상’을 들 수 있다. 팬들은 BTS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자유롭게 리액션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그러자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팬덤을 형성하면서 타인에게 이를 권하는 방식으로 팬들은 계속 늘어났다. 또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의해 음반뿐만 아니라 비디오, 웹툰, 도서, 다큐 등의 미디어가 제작되고 BTS의 캐릭터와 이모지(Emoji)가 데이터베이스화되자 팬들은 창작자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해석을 담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BTS게임’까지 만들어진다고 하니, 팬들이 어디까지 주체적인 리액션을 펼칠지 기대가 크다.

캐릭터들은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일러스트, 트레이딩카드, 피규어, 기타 여러 상품처럼 미디어의 경계를 허무는 트랜스미디어 시대에 우리 뇌리에 줄곧 남아 있다.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맞고 틀리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 내용 자체보다는 상상력을 동원해 캐릭터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사용자가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값진 경험이다. 트랜스미디어에서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은 사라지고 캐릭터와 그것에 대한 향유만 있을 뿐이다.

사용자가 주체성을 회복할 때,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것처럼 ‘큰 이야기’가 사라진 후 ‘끝나지 않는 일상’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삶의 형태가 되었다. 즐기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게임적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란 이런 게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컴퓨터가 있기 전부터 게임 속에는 상상이 있었다. 상상과 현실을 구태여 구분할 필요도 없는 놀이의 세계가 있었다. 그 놀이 속에서 우리는 장기판과 같은 상징체계를 만들고 또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끝나지 않는 일상’을 넘어가기 위해서 현실을 ‘거대담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놀이마당으로 여기면 좋겠다. 대의명분과 구호, 그리고 인생의 목표라는 큰 이야기는 일종의 폭력 내지는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런 큰 이야기는 강박증만 높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오늘 저장용량 때문에 불필요하거나 중복된 데이터를 스마트폰과 PC, 클라우드에서 큰맘 먹고 삭제했다. 여기저기 저장장치에 흩어진 데이터 통합도 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남겨진 것은 잊지 못할 사람들의 사진과 그 기록들이라는 것을. 고대 신화 공부를 하다 남는 게 캐릭터의 특성으로 흡수된 신과 인간이듯 내 주변의 캐릭터들과 그들의 특성들만 남았다. 이제는 그 추억을 더듬으며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시작하련다. 그리고 언젠가 추억이 될 현실의 등장인물들, 곧 나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놀이마당’을 펼치고 싶다. 오래전에 본 영화의 대사가 이런 ‘놀이마당’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너는 죽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프냐, 양반으로 나면 좋으련?”

“아니, 싫다.”

“그럼 왕으로 나면 좋으련?”

“그것도 싫다. 나는 광대로 다시 태어날란다.”

“이놈아, 광대 짓에 목숨을 팔고도 또 광대냐?”

“그러는 니년은 뭐가 되고프냐?”

“나야 두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

그래, 징한 놈의 세상.

하룻밤 신명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 번 맞춰보자.(영화 <왕의 남자>)


큰소리치는 양반도 없고, 힘으로 겁박하는 왕도 없는 인생의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제대로 한 번 놀아보자.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다!

김동훈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지금 많이 보는 기사

▶ 댓글 많은 기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