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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만파식적] 기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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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1896년 독립신문에 이색적인 의약품 광고가 실렸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금계랍(金鷄蠟)을 국내에 판매하니 도매금으로 싸게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금계랍은 당시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이던 ‘키니네’였는데 발음이 어려워 이렇게 불리게 됐다. 우리나라에도 말라리아가 성행해 치료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금계랍이 특효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금계랍을 먹으면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며 노인들이 장수를 누린다는 유행가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키니네는 진통·해열 효과까지 갖춘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면서 조선 말기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인기 1위 품목에 오르기도 했다.

키니네는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기나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 성분으로 일찍이 말라리아 특효약이자 해열·소화장애 치료제로 쓰였다. 잉카족은 원숭이가 감기에 걸리면 기나나무 껍질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고 해열제로 먹게 됐다고 한다. 일설에는 페루 총독으로 부임했던 스페인 백작의 아내가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인디언들의 민간요법에 따라 기나나무 껍질로 만든 약을 먹고 완치되면서 이 나무가 유럽에 본격 소개됐다고 전해진다. 키니네는 잉카문명의 공용어였던 케추아어로 ‘나무껍질 중의 껍질’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기나나무는 과거 열대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열강들로서는 풍토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 자원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본이 기나나무 주산지였던 자바섬을 점령하자 연합군은 항말라리아제 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과학자들을 동원해 기나나무를 대체할 합성 치료제 ‘클로로퀸’을 개발해 말라리아 퇴치의 신기원을 열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기나나무를 비롯한 말라리아 치료제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코로나19 환자들에게 시험해 일부 효과를 봤다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식품의약국(FDA) 차원에서 클로로퀸을 코로나 치료제로 승인할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각국의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이 하루빨리 결실을 거둬 세계가 코로나19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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