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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신분 질서에 도전한 정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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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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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석담일기>에 의하면 정난정(鄭蘭貞, 1506~1565)은 윤원형의 첩이었다가 본처를 내쫓고 부인(夫人)이 되었다. 난정은 윤원형을 움직여 뇌물을 받고 수탈을 일삼아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권력을 농단한 지 20년, 그들이 소유한 저택 10채에는 재화가 흘러넘쳤다. 원형이 실각한 뒤 백성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며 죽이려고 덤벼들자 둘은 황해도 강음으로 달아났다. 지은 죄가 워낙 엄청나 난정을 의금부에 하옥시키라는 요구가 빗발치지만 임금은 계속 머뭇거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난정은 자신을 옥죄어 오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살을 하는데, 며칠 후 원형도 죽었다. 당시의 여론이기도 한 이런 모습의 정난정은 사극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즉 몽매한 남성 권력자를 색기(色氣)로 장악하고 배후에서 조종하여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낸 파괴력 쩐 여자이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 체계에서 착취의 대상이었던 한 여성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자기 삶의 조건을 만들어간 것에 주목한다면 정난정은 충분히 새로워질 수 있는 인물이다. 무관인 양반 정윤겸과 관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 집을 나와 기녀로 활동했다고 한다. 주어진 삶을 거부한 첫 행보라 할 수 있다. 윤원형의 첩이 된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기른 것을 보면 스무살을 전후하여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기녀의 신분으로 왕비 동생의 첩 즉 왕실 외척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보통의 수완으로는 불가능하다. 윤원형의 첩으로 지내던 그녀가 본처 김씨를 몰아내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나이 50이 가까워서이다. <경국대전>에 ‘첩은 처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해 놓았지만 당시의 권력 문정왕후의 승인으로 난정은 외명부 정1품 정경부인에까지 오른다. 신분의 수레바퀴에서 신음하던 한 여자의 인간 승리,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란 늘 명암이 있고 아이러니한 것들이 뒤섞인 흥미로운 해석의 장이다.

윤원형(1503~1565)은 누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 농단을 일삼아 사림(士林)의 울분을 자아냈다. 그를 일러 탐욕스럽고 사특하며 독살스러워 얼굴은 늙은 여우 같다고 했고, 기름진 전답은 걸신든 듯 마구 취해 사가(私家)가 나라보다도 부자고 개인이 임금보다도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윤원형의 탐욕은 욕망의 화신 정난정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고 그녀의 악행 또는 한없이 부풀려진다. 본처 김씨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인데, 국왕 명종은 근거 없는 음모라며 단칼에 일축해버린다. 사람들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꿰찬 천민 정난정을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난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편을 찔러 처와 첩, 적자녀와 서자녀를 차별하는 법안을 폐기하도록 한다. 자기 자녀들을 위한 것이지만, 이 일은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서얼허통이 열리자 정난정은 그녀 소생의 자녀들을 사대부 집안과 혼인시켜 주변을 공고히 한다. 또 자녀로 맺어진 인척을 세자빈의 자리에 밀어넣었고,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군의 아들인 정2품의 왕자를 사위로 맞아 세자를 잃은 명종의 보위를 잇고자 기획하기도 한다. 처의 지위를 획득하자 자녀들의 신분 세탁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는 등 금지되었던 자신의 욕망을 하나씩 실현해 간 것이다.

물건과 인간의 경계인(境界人)에서 여자 인간 최고의 자리 정경부인에 오르기까지 격동의 60년을 보낸 정난정. 그녀를 잡아다 법정에 세우라는 아우성을 뒤로한 채 자살로 삶을 마감한 최후의 순간에 정난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난정이 열어 준 서얼허통은 잠시뿐, 강상 윤리의 기치를 내건 적처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정난정의 성공신화를 누구라서 비웃을 것인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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