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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편견과 차별에 관한 한 모두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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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세상 떠난 트랜스젠더 뇌신경과학자 벤 바레스 교수 자서전

43살에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학계 성차별 깨닫고 급진적 운동


한겨레

벤 바레스: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

벤 바레스 지음, 조은영 옮김, 정원석 감수/해나무·1만5000원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성폭력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은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고정되어 있다. 어떤 회사에서든 연차가 쌓일수록, 특히 임원급으로 갈수록 거의 예외 없이 특정 성별의 직원이 많이 일하고 평균 연봉이 높으며 승진이 빠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그렇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있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면 반론이 들려온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가 아닌, 성별을 떠난 계급의 문제라든가, 사회적 인식의 문제라든가 하는 말이다. 뛰어났던 과학자의 자서전인 <벤 바레스>는 “성별을 떠나”라는 주문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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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바레스는 2017년 12월27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으로 진단받고 21개월 동안 쓴 이 책은 그가 ‘바버라’에서 ‘벤’이 된 삶의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바버라 바레스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한 뒤 다트머스 의학대학원에서 의사가 되었고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런던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했으며, 1993년 스탠퍼드 대학교 신경생물학과 교수가 되었다. 바버라는 43살에 성전환해 벤이 되었고 이후 벤은 스탠퍼드 신경생물학과 학과장에까지 올랐다. 1972년 MIT에 입학할 때까지 바버라는 성차별을 겪을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버라가 비정상적으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냈을 때 교수는 점수를 주는 대신 남자친구가 문제를 대신 풀어준 것 아니냐며 부정행위를 비난했다. 바버라는 여성 과학자로 성공한 뒤 벤으로 성전환했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자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성전환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들은 말. “벤 바레스의 연구가 여동생보다 훨씬 낫네.” 벤 바레스는 과학계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급진적 운동가가 되어, 래리 서머스 하버드 대학교 총장의 성차별 발언을 비판한 칼럼을 <네이처>에 실어 학계에서의 성차별을 공론화했고, 이후 래리 서머스는 총장직을 사퇴했다.

연대기순으로 작성된 <벤 바레스>에서, 어린 바버라는 성별 불쾌감, 차이, 혼란을 느끼며 십대 내내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다고 적었다. 성별 혼란으로 인해 지속적 괴로움, 낮은 자존감, 강한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의학대학원 수업 중 생식기관 장애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서 성별 혼란과 자신이 지닌 뮐러관 무발생 증후군(난소를 제외한 내부 생식기관이 없다) 사이의 연관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성 정체성 문제는 점점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다. 자살 충동이 너무 심해져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고 2~3년의 시간이 지나 마흔이 되었을 때 그는 유방암에 걸렸다. 그는 유방절제술을 받으며 다른쪽 유방도 가족력을 이유로 함께 절제를 요청했다. 벤 바레스는 스탠퍼드에서 4년 만에 종신직 부교수로 승진한 뒤 기사를 통해 트랜스젠더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 자신처럼 성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성전환을 하는 일이 경력을 끝장낸다면 어떡해야 하지? “성별을 바꾸어야 할지 생을 마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일주일간 나는 스트레스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의 결정은 동료들에게 지지를 얻었고, 테스토스테론 복용을 시작했다.

<벤 바레스>의 아름다움 중 하나는 그가 헌신한 신경생물학 연구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연구자였고 연구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동료들과의 협업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분명히 알게 해 준다(책 말미에 그의 연구실에 있었던 젊은 연구자들의 이름과 현재 일하는 곳 리스트가 있다). 3장에 이르면 이공계 여성 과학자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벤 바레스는 성을 바꾸고 나서 남자라서 유리한 삶을 경험한 다음 그 장벽을 완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벤 바레스의 글 ‘성별이 문제가 되는가?’를 트렌스젠더 동료인 조안 러프가든이 요약한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사실이 아님이 증명될 때까지 여성은 무능하다고, 반면에 남성은 유능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분명히 성별의 문제고 성차별의 문제고 성폭력의 문제다. 여성의 경험을 경청할 것. 더불어, 편견과 차별에 관한 한 우리 모두 ‘괴물’이라는 벤 바레스의 말 역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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