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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소상공인 대출도 마스크 판박이… 출생연도 따라 홀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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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꺼낸 대책이 결국 선착순"

아직 손도 못댄 대출신청 13만건… 정부조차 "내달 말 병목 풀려"

정부, 소상공인 줄세우기 비판 쏟아지자 '대출 2부제' 발표

대출창구도 신용등급따라 소진공·시중은행·기업은행 분산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최모(66)씨는 지난 26일 오전 7시쯤 소상공인 정책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 전주센터를 찾았다가 '250번'이 적힌 번호표를 받았다. 오후 4시쯤 다시 센터를 찾아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날 센터에는 620명의 신청자가 몰렸지만, 301명은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존폐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들이 정부의 긴급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소진공으로 몰려들면서 마스크 대란 때와 비슷한 긴 행렬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렵사리 대출 서류를 접수시켜도 언제 자금이 나올지도 기약이 없다.

소상공인의 불만이 들끓자 27일 정부가 대책을 내놨다. 소진공을 통해서만 가능하던 긴급자금 대출을 다음 달 1일부터 신용등급에 따라 시중은행과 기업은행으로도 분산하고, 출생연도에 따라 대출을 신청하는 '홀짝제'를 시행해 길게 줄 서는 불편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마스크 5부제'에 이어 '대출 2부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긴급자금이 필요한 소상공인 대부분이 신용등급이 낮은 데다 이미 접수된 자금 신청이 워낙 많아, 이 정도 대책으로는 대출 병목이 해소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소상공인은 "(27일 아침 일찍) 온라인 상담 예약을 하러 소진공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10초 만에 예약이 마감됐다"며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 없이 모든 소상공인을 '선착순'으로 '뺑뺑이'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27일 "시중은행 7000여개 지점과 기업은행 700여개 지점을 통해서도 대출이 이뤄지면 병목현상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한시가 급한데… - 긴급자금 대출 신청을 하기 위해 지난 25일 오전 서울 광진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동부센터를 찾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있다. “100조원 규모 자금을 투입해 망하는 기업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현장에선 줄 서기로 인한 불만이 폭증하자 정부가 27일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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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이날 발표한 '소상공인 금융지원 신속집행 방안'에 따르면, 신용등급 1~3등급인 소상공인은 다음 달 1일부터 시중은행에서 1.5% 금리로 1년간 3000만원 이내의 금액을 빌릴 수 있다. 신청 후 5일 이내에 대출이 가능하고 보증료도 없다. 신용등급 1~6등급인 소상공인은 다음 달 1일부터 기업은행에서 대출 신청을 받는다. 보증 병목현상을 없애기 위해 3000만원 이하 대출은 기업은행이 보증 업무를 위탁 처리하고, 3000만~1억원 대출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이 보증 업무를 나눠서 처리하기로 했다. 모든 보증 업무를 지역 신용보증재단이 처리하는 바람에 생겼던 극심한 병목현상을 없애겠다는 취지다.

또 신용등급 4등급 이하인 소상공인은 소진공에서 1000만원 한도로 직접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기존에는 소진공 지역센터에 신청한 뒤 지역 신용보증재단에서 보증서를 받고, 대출은 시중은행에서 받는 방식이어서 절차가 몹시 까다로웠다. 불만이 높자 정부는 대출 한도를 낮추는 대신 절차를 간소화한 것이다. 대출 시 필요한 서류도 사업자등록증명, 임대차계약서, 통장 사본 3종으로 줄였다. 신청자들이 길게 줄을 서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 달 1일부터는 홀짝제가 도입된다. 마스크 주5일제와 비슷하게 출생연도가 홀수면 홀수일에, 짝수면 짝수일에만 대출 신청을 할 수 있다.

◇한시가 급한데… "4월 하순쯤 정상화"

하지만 시중은행 대출은 1~3등급만 받을 수 있다. 신용등급이 낮은 대부분 자영업자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신용등급이 중급인 소상공인·자영업자는 기업은행 대출을 기대해볼 수 있지만, 이미 쌓여 있는 대출 신청 서류가 워낙 많아 정부 예상으로도 대출 받기까지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김 차관은 "아직 심사에 착수하지 못한 신청 건수가 12~13만건에 이른다"며 "누적 물량을 없애는 데 2~3주 정도 걸려 4월 하순쯤 돼야 정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출 집행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 대출 프로그램은 한도를 낮췄다. 소진공의 경영 안정 자금은 원래 최대 7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했지만 저신용자에 대해서는 대출 한도가 1000만원으로 줄었다. 타금융기관에 추가 대출 신청을 하더라도 신용도가 낮아 대출이 사실상 어렵고, 대출을 받을 수 있어도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소상공인 업계에서는 소진공센터 대출 심사 직원을 늘리지 않으면, 홀짝제든 무엇이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소진공 전체 직원은 600여명이고 전국 62개 센터는 대부분 센터장 포함 3~5명으로 운영된다. 소진공은 "센터마다 하루 30~50명씩 상담해오다 갑자기 수백~수천 명이 몰려드니 인력 구조상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면서 "현재 본사 인력도 모두 현장 상담에 투입된 상황"이라고 했다. 경기 안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46)씨는 "(홀·짝제를 하면) 줄 서는 사람은 약간이라도 줄겠지만, 그렇다고 자금 지원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면서 "정부가 소상공인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눈앞의 비판만 모면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중 금리가 얼만데… 低利라고?

금리가 지나치게 높다는 불만도 나온다. 서울 강북구의 한 소상공인은 "몇 시간 기다렸다가 소상공인정책자금 상담을 받았는데, 애초에 연 1.5%라던 금리가 알고 보니 연 3%에 육박했다"면서 "기준금리 연 0.75% 시대에 이게 무슨 초저금리냐"고 했다. 정부에서 홍보한 '연 1.5%'는 기본 이율이고, 실제로는 신용등급에 따라 금리가 달라지는 데다, 보증서를 떼주는 지역신보에 연 0.8%에 해당하는 수수료까지 내야 해 결국 최종 금리는 2.3~3.0% 사이라는 것이다.

정책만 앞서가고 지원 현장에서는 절차를 모른다는 원성도 계속 되고 있다. 보증과 대출을 실행하는 창구 직원들이 여전히 소상공인 금융 지원의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다. 대전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는 윤모(50)씨는 "지역신용보증기금과 은행 창구 직원들도 너무 힘들어 정부 비판을 하더라"면서 "그들의 지치고 힘든 모습을 보는 내가 더 미안했다"고 말했다.

[전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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