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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터치! 코리아] 나도 n번방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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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가입자들은 물론 낮은 형량 일관한 사법부

性 범죄 심각성 알고도 외면·침묵한 모두의 책임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성매매금지법이 제정된 2004년, 대한민국은 찬반으로 뜨거웠다. 반대하는 쪽 가장 큰 논거는 법의 실효성이었다. 인류 역사와 함께한 성매매를 무슨 수로 막느냐는 거다. 성욕 하나 절제할 수 없다면 동물이지 인간이냐고 발끈했던 기억이 난다. 가장 경악한 건, "홍등가가 사라진 도시의 풍경은 얼마나 삭막하고 비인간적이냐"는 개탄이었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세대란 훈장을 단 엘리트 남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참담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지만 성매매는 신(神)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란 논리는 여전히 강력하다. 살인과 다름없는 'n번방' '박사방'의 잔혹한 성착취 사건이 터지자 성매매 불법화를 탓하는 억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부장, 꼰대류를 혐오한다는 20~30대조차 이 논리에 다수 동조한다는 사실은, 박사방 운영자가 25세 '자원봉사자' 청년이란 사실만큼 충격적이다. 장기매매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훼손하는 성매매를 합법화하면 이 악랄한 범죄가 사라질까?

한국 사회에서 유독 바뀌지 않는 게 성(性)인식이다. 정보화, 세계화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며 변화한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여성을 성적(性的) 배설과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은 견고히 대물림된다. 1970~80년대 집창촌 성매매와 21세기 디지털 성범죄의 구조는 얼마나 흡사한가.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유인하는 수법이 같고, 나체 사진으로 협박해 미성년자까지 성노예로 부린 n번방 운영자들은 막대한 빚을 쌓게 한 뒤 성매매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포주의 진화된 버전이다.

일부 소시오패스, 은둔형 외톨이들만의 일탈도 아니다. 적게는 2만명, 많게는 26만명이라는 가입자들은 10대부터 40~50대로 광범위하다. '박사방' 조주빈도 "여성은 돈벌이다. 돈이 되니까, 소비자들이 많으니까 한다"고 했다. 죄의식도 없다. 돈으로 여성의 몸을 샀으니, 노예 삼아도 된다고 믿는다. 여성을 '점령'하고 '사냥'하는 건 자랑거리다. 여기엔 '남자다움'에 대한 일그러진 판타지가 작동한다. 강력한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가정폭력, 성폭력의 근원이다. n번방에서 1대 운영자 갓갓을 만나 누구 범죄가 더 센가 논쟁했다는 조주빈은 이를 "역사적 정상회담"이라고 자평했단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솜방망이 처벌을 거듭해온 사법부 역할이 지대했다.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에 대한 법정형은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이지만, n번방 2대 운영자 켈리에겐 "진심으로 반성하더라"며 징역 1년을 선고했다. n번방 전신인 'AV스눕' 운영자도 1년 6개월이다. 아동 성착취 영상 전문인 '웰컴투비디오' 창설자는 1년 6개월을 산 뒤 다음 달 출소한다.

n번방의 분노를 표로 가져가려는 데만 혈안이 된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다. 얼굴 합성 음란물(딥페이크)을 놓고 "예술로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다" "자라나는 애들은 다 그런 짓한다"고 말한 법사위 의원들의 저급한 의식을 보라. 이 무법천지를 간파해 수억원대 수익을 창출해온 악마가 조주빈이다.

n번방의 잔혹성을 처음 폭로한 건 두 명의 여대생이었다. 위험을 무릅쓴 추적 끝에 작년 9월 n번방의 존재를 알렸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는 데 반년이 걸렸다. 엄청난 파장과 성과를 거두고도 익명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이들은 "피해자들을 선정적으로 묘사하지 말아 달라" "2차 가해를 막아 달라"며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그들은 묻고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관한 당신도 공범 아니냐고. 그 심각성을 알고도 침묵한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나 또한 n번방의 공범이었다.

[김윤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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