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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막걸리 감성도 있는 와인의 세계 [명욱의 술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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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고급술이다. 8000년 전 조지아에서 시작한 오래된 유적부터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진 농업의 문명과 중세의 수도원을 거쳐 차곡차곡 그 가치를 쌓아왔다. 그래서 와인을 담는 병, 마시는 잔, 오프너, 소믈리에 복장, 전용 저장고(셀러)까지 있는 다양성을 가진 술로 발전했고, 전 세계인이 즐기는 술이 됐다.

이러한 와인에도 의외로 서민적이고 편한 부분이 많다. 우리 것에 비유하자면 막걸리 감성이다. 대표적인 것이 물을 타서 마시는 문화다. 고대 그리스는 ‘와인을 함께 마시는 토론’이라는 어원의 심포지엄을 탄생시킬 정도로 와인 저변이 넓은 나라였다. 도수가 높은 와인을 원액 그대로 마시는 것을 야만행위로 생각한 부분이 있어서다. 이는 그리스 상류층이 그리스 북쪽의 슬라브 계열의 스키타이족의 원액 음주 문화를 혐오해서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 그리스어로 와인을 크라시(κρασ?)라고 하는데, 이것의 어원은 혼합이라는 뜻이다. 즉, 와인과 물을 섞어 마셨다는 의미다.

세계일보

심포지엄의 어원이 된 그리스의 술자리.


기원전 168년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함에 따라 와인은 자연스럽게 로마로 이어진다. 여기에 로마제국의 확대에 따라 현재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 등 내륙 지방에도 물을 타서 마시는 와인 문화가 생긴다. 당시 와인은 포도과즙이 농축된 단맛이 강한 술이었다. 현재는 위스키 및 증류주를 마실 때 알코올 도수를 낮추거나 마시기 편하게 하기 위해 물을 섞지만, 이때는 와인의 단맛을 줄이기 위해 물을 넣었다. 이러한 형태는 술의 개념보다는 주스 개념에 가까웠는데, 경수가 많은 유럽의 경우 물 자체가 맛이 없었던 만큼, 좀 더 마시기 편하게 와인을 넣어주기도 한 것이다.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신 것이 아닌, 물에 와인을 타서 술이 아닌 음료로 와인을 즐긴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로랑 바르트는 고대 그리스인은 와인에 비해 물을 8배나 넣어서 마셨다고 했으며, 나폴레옹도 유럽 원정 중에는 물을 탄 와인을 마시며 전략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독일에는 물을 탄 와인의 이름이 정확하게 구분돼 있다. 화이트 와인에 탄산수를 넣은 것은 바인쇼를레(Weinschorle), 레드 와인을 넣은 것은 롯바인쇼를레(Rotweinschorle)다. 둘 다 청량감 좋은 소다를 넣은 만큼, 여름의 맥주, 비 오는 날의 막걸리처럼 시원하게 마시는 술이다.

우리의 막걸리 문화 역시 비슷한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많이 사라졌지만, 막걸리를 마시고 남은 지게미에 물을 넣어 한번 더 짜서 마신 문화다. 현대의 막걸리의 원액은 알코올 도수 15% 정도인데, 대부분 물을 넣어 6~8%로 도수를 맞춘다. 어떻게 보면 독일의 와인 음료인 바인쇼를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힘들어하고 있다. 이럴 때 국가가 민족으로 나누고 배척하는 것이 아닌, 전 세계가 하나라는 공조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인류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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