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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헬리콥터 드롭이 가장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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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글로벌 현금 지급 릴레이, 좌우 넘어 국외 보수·진보 경제학자들 반응 호의적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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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한 대학원에 다니는 영주권자 차아무개(31)씨는 3월11일부터 기존 수업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면서 보름째 집에서만 지낸다. 코로나19로 교내 기숙사도 문을 닫자 같이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 3분의 1은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도서관과 박물관 등도 문 닫고 식당과 카페, 술집에서도 매장 내 식사를 제한하면서 이동이 멈췄다. 시장은 얼어붙었다. 지역경제를 위해 방문 포장이나 배달 주문이라도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차씨는 감염 등이 우려돼 직접 집밥을 차려 먹고 있다. 게다가 최근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반려동물 산책 말고는 외출도 조심스러웠다.

미국 초고소득자 제외하고 최대 147만원

마스크 구매는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월 중순부터 N95(한국의 KF94 등급) 마스크를 사러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품절이었다. 3월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비상을 공식 선언하자 휴지, 손세정제, 파스타 등 생필품까지 일시적으로 동났다. 사람들은 줄 서서 생필품과 식재료를 사재기했고 온라인 쇼핑 급증으로 세계적인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당일 배송 서비스마저 지연됐다. 차씨는 <한겨레21>에 “미국은 1∼2주마다 주급 형태로 임금을 받는데 당장 직장 폐쇄, 휴직 등으로 소득이 줄어든 일용직이나 단순직 노동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의 현금 지급 발표에 반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 효과가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거 같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3월17일 모든 국민에게 1천달러(약 124만원)를 주겠다는 ‘현금 지급’ 카드를 꺼낸 뒤 열흘도 안 돼, 미국 상원은 3월25일 2조2천억달러(약 2700조원) 규모의 재정 투입 패키지를 통과시켰다. 이는 차씨 설명처럼 식당과 쇼핑몰 등이 문 닫으면서 코로나19발 실업 대란 가능성에 대비한 조처로, 한시적인 현금 지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미국과 일본 등이 시행한 바 있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3월 셋째 주 미국 주간 신규 실업수당 신청 건수가 2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비관론까지 내놓은 상황이었다. 지급 대상과 방법 등이 나라마다 다르지만 일시적인 현금 지급이 지구촌 재난의 구원투수로 다시 등장한 이유였다.

현금 지급 방법은 크게 선별 지급과 보편 지급으로 나뉜다. 코로나19로 인한 전례 없는 재난 상황에서 특정 계층이나 집단 등에 제한적으로 지급하거나 모든 국민에게 일정 소득액을 지급하는 식이다. 미국에선 연봉 9만9천달러(2018년 소득 기준, 약 1억2170만원) 초고소득자를 제외한 납세자 한 사람당 최대 1200달러(약 147만원)를 준다는 점에서 낮은 수준의 선별 지급으로도 볼 수 있다. 앞서 2월26일 홍콩은 중국 송환법 반대 시위 여파에 코로나19까지 겹치자, 만 7년 이상 거주한 18살 이상 모든 영주권자(약 700만 명)에게 한 사람당 1만홍콩달러(약 155만원)를 주기로 했다.

경기회복 효과 등을 고려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바우처(쿠폰)를 혼합해 지급하는 나라도 있다. 유효기간과 업종, 품목 등을 제한해 직접 지출을 장려하려는 조처다. 실제 싱가포르에선 21살 이상 모든 시민권자에게 소득과 재산에 따라 최고 300싱달러(약 25만원)의 일회성 현금을 지원하고, 50살 이상 국민에게는 100싱달러(약 8만원) 마일리지가 포함된 카드를 추가 지급했다. 21살 이상 주택개발청(HDB) 공공주택 거주자에게는 100싱달러(약 8만원)의 식료품 바우처 등도 제공한다.

대만은 경기부양 바우처, 마카오는 전자바우처

대만 역시 피해 업종·분야 기업 직원에게 404억대만달러(약 2조4천억원) 규모의 경기부양 바우처를 지급할 예정이다. 마카오 정부도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되는 시점에 모든 국민에게 한 사람당 3천파타카(약 46만원) 상당의 전자바우처를 배부한다는 입장이다. 바우처는 3개월간 유효하며 특정 식당과 소매점, 쇼핑센터에서만 쓸 수 있게 제한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마카오 정부가 도박산업 호황으로 늘어난 재정의 일부를 해마다 시민에게 분배하기 위해 도입한 ‘현금배당 계획’의 하나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피해 집단과 취약계층 등에 집중 지원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나라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정부는 3월12일 일자리 안정화를 위해 취약계층과 중소기업에 현금 보조금을 주는 방안을 마련했다. 직업교육 훈련생 12만 명에게 약 13억호주달러(약 1조1천억원) 상당의 보조금을 1월부터 9개월간 지급할 계획이다. 3월31일부터는 연금과 실업급여 수급자 650만 명에게 한 사람당 현금 750호주달러(약 58만원)를 추가 지급할 예정이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한 중국은 1∼2월 소비 판매율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5%나 떨어지자 일부 지방정부에서 생활보장 소득과 보조금 형태로 현금을 선별 지급하기로 했다. 충칭시 중현은 저소득층 2만4천여 명에게 2932만위안(약 50억원)의 생활보장 소득을 지급할 예정이다. 한 사람당 약 3천위안(약 51만원) 수준으로, 최저생계비의 두 배 수준이다. 산둥성 칭다오시는 빈곤층에게 생활보조금 7446만위안(약 128억원)을 지급하고 쌀, 밀가루, 채소, 달걀 등 필수 식료품도 지원하기로 했다.

일시적인 현금 지급에 좌우를 넘어, 외국의 일부 보수·진보 경제학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맨큐의 경제학> 저자로 유명한 보수파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는 3월13일 블로그에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가려내기가 어렵고 추려내는 작업에 내재한 문제를 생각하면 모든 미국인에게 1천달러씩 주는 것이 경기부양을 위한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정부 부채를 걱정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라며 적극적인 지출을 옹호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진보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학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3월10일 “세금 감면처럼 간접적인 방식보다 정부가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월가의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학 교수도 3월14일 트위터에 “헬리콥터 드롭(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시중에 뿌리는 것을 비유)으로 미국 내 모든 거주자에게 1천달러씩 주는 것이 경기침체에 따른 충격을 줄이는 가장 신속하고 혁신적인 부양책”이라고 썼다.

‘외출 자제’에도 소비로 연결될까

다만 외출을 자제하는 코로나19 사태의 특수성 때문에 재난소득 일부만 실제 소비로 연결될 수 있어 경기부양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관측도 있다. 홍콩에 있는 프랑스계 금융회사 나티시스의 알리시아 가르시아 에레로 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경제학자는 홍콩 정부의 현금 지급 발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금 지급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없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거다. 이는 소수의 부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었을 한 방울(재정)을 바다에 떨어뜨린 것과 같다.”

글로벌 현금 지급 릴레이는 ‘자산·소득 등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정기적으로’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존 기본소득과는 개념이 다르다. 기본소득은 2010년대 스위스, 핀란드, 네덜란드, 캐나다 등 일부 나라에서 제한적으로 실험된 아이디어였다. 스위스는 세계 최초로 2016년 18살 이상 모든 성인에게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을 주는 기본소득보장제도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까지 했지만 76.7%의 반대로 무산됐다. 코로나19가 촉발한 한시적인 현금 지급이 기본소득 논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이제 지구촌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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