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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시가 있는 월요일] 낙방 후 먹는 짜장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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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밥을 절반만 먹고 오렴
그래야 글이 잘 풀린다고 하더라
지도 선생님 말씀에 따라 나는 아침을 굶었다(중략)
백일장을 마치자마자 중국집엘 들렀다
식탁 위엔 달랑 한 그릇의 짜장면
(중략)
푹 고개를 숙이고 터벅거리던 귀갓길
하루를 공친 어머니와 낙방 소년이 아직도
손을 잡고 걷는다 비록 낙방은 하였으나
해마다 오월이면 그날로 돌아가서
슬픔이 이 길을 걷는 보람인 줄도 모르겠다고
빈속을 칭얼거리는 슬픔 덕분에
어머니 손을 잡고 걷는 축복을 갖게 된 것이라고

-손택수 作 <백일장과 짜장면> 중


백일장 학급 대표가 된 소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대회에 나갔다. 속이 비어 있어야 글이 잘 나온다는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밥도 거른 채 대회장에 갔지만 결과는 낙방이다. 그래도 소년은 행복하다. 비록 자천이었지만 학급 대표가 되어 봤고, 생계 때문에 늘 바쁘셨던 어머니와 함께 걸을 수 있었고, 짜장면도 한 그릇 얻어먹었으니.

어린 날의 수채화 한 점을 눈앞에 두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시인은 평일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었던 그날의 '축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축복이 그를 살게 했으므로….

뭉클한 풍경이다. 좋은 시는 이렇듯 소소하면서도 성스럽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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