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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심윤희칼럼] 부의 대물림 막으려다 기업이 사라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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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코로나19 백신으로 유명한 영국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 원래 이 기업은 스웨덴의 '아스트라AB'였다. 1984년 최대주주였던 창업자의 부인이 사망한 후 자녀들이 상속세 폭탄을 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 스웨덴의 상속세율은 70%에 달했다. 자녀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팔기 시작하자 주가가 폭락했고, 주식을 팔아도 상속세를 마련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결국 아스트라는 영국의 '제네카'에 헐값에 팔렸다.

스웨덴 기업 이케아도 1982년 높은 상속세와 법인세를 피해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겼다. 이처럼 '세금 망명' 기업들이 잇따르자 스웨덴은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30%)로 전환했다. 이 나라는 높은 세율과 복지로 부의 재분배를 이뤘지만 과도한 세금 때문에 기업들이 사라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속세 종주국' 영국도 최근 상속세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에 충격을 받아 부의 집중 완화를 목적으로 상속세를 시행했지만 이중 과세 논란이 커지고 있어서다. 상속세를 내는 국민 비중이 4%로 높아지면서 상속세가 '가장 혐오하는 세금'으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최근 상속세 개편 논의에 불이 붙고 있다. 그동안 '부자 감세' '부의 대물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뜨거운 감자'였던 상속세 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대통령실이 '최고세율 인하'가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다. 학계에서도 상속세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며 '기업 밸류업'을 위해 상속세 과세표준을 3배 이상 높이고, 최고세율을 30%로 낮춰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는 낡은 상속세가 한국 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상속세가 불러온 가장 코미디 같은 장면은 고 김정주 넥슨그룹 회장의 유가족이 상속세로 지주회사 NXC 지분을 물납하면서 기획재정부가 넥슨의 2대 주주로 등극한 것이다. 삼성 일가도 고(故)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상속세 12조원의 재원 마련을 위해 주식담보대출을 받고, 계열사 지분을 대거 매각했다. 최근 한미약품의 경영권 분쟁도 오너 일가에게 부과된 5400억원의 상속세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소·중견기업들 가운데 상속세 부담 때문에 승계를 포기하고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매각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부자만 상속세가 두려운 게 아니다. 지난해 상속세 과세 대상자는 2만명에 육박하면서 2019년(8357명)에 비해 2.4배 늘었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서울에 아파트 한 채만 있는 중산층도 상속세를 내야 할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상속세는 너무 낡았다. 2000년 세법 개정 이후 손보지 않아 24년째 과세표준과 세율이 그대로다. 공제한도 최대 10억원도 1997년 도입 이후 27년째 유지되고 있다. 피상속인의 유산 전체에 세금을 매기는 과세 방식도 74년간 바뀌지 않고 있다. 세율은 징벌적 수준이다. 최고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에 붙은 할증까지 더하면 60%로 뛴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이 크게 늘고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급등하는 등 과세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불합리한 세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먼저 상속세 개편을 시사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조자룡 헌 칼 쓰듯 '부자 감세' 주장을 다시 꺼내고, '세수 결손'을 운운하며 후퇴하는 모양새다. 상속세의 취지는 '부의 세습·집중 완화'지만, 퇴행적인 세제를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적 손실이다. 부의 대물림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이 100년 기업으로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 스웨덴은 상속세를 폐지했지만 이미 떠난 기업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모적 공방을 접고 현실에 맞게 대수술에 나설 때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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