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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만주사변 직전 임정 찾아가 인터뷰… "김구는 아버지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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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3] 김구와 임정 활동 보도

임정 요인 5회 연쇄 인터뷰 실어 "민족 위한 절개·고행적 실천"

해방 후 환국 소식 全面에 게재, 임정의 신탁 반대 노선 지지

'남북협상' 대해선 비판적 입장… 김구 서거 땐 열흘 간 추모 기사

5년 3개월 13일 만에 복간된 지 사흘째인 1945년 11월 25일 자 조선일보는 타블로이드판이던 신문을 일시 강제 폐간 이전 크기로 확대했다. 그리고 1면 왼쪽에 제호(題號)보다 큰 활자로 '환영임시정부주석일행환국(還國)'이란 제목을 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 소식을 담았다.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은 이틀 전 꿈에 그리던 서울에 돌아와 다음 날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동포에게 귀국 인사를 전했다. 오른쪽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김구 선생 일행을 환영함'이었다. 1면의 나머지 부분에는 '임시정부 27년 약사(略史)', 임정 주요 인사들의 약력, 임정이 광복 직후 발표한 '당면정책 14개조', 국내 각 당파의 반응 등이 실렸다.

2면에는 임정에 대한 기대를 전하는 '거리마다 환호성 창일(漲溢)'이란 기사가 머리에 올랐다. 김구의 첫 기자회견과 향후 정국 전망이 그 왼쪽에 자리했다. 또 김구와 함께 귀국한 학병 출신 광복군 장교 장준하, 안중근의 조카딸이자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의 인터뷰 기사가 그 옆에 있었다.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해 '임정 환국 특별판'을 만든 이날 자 신문은 이후 조선일보와 임정의 관계를 예고했다. 조선일보는 신탁통치 반대, 좌우합작 지지 등에 앞장서며 임정의 정치 노선과 함께했다. 사장 방응모는 김구가 이끄는 정치·사회단체에 참여했다. 서민적 풍모를 지닌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황해도 출신인 김구와 평안도 출신인 방응모는 지역적으로도 서북(西北)으로 묶일 수 있었다.

조선일보

위 사진은 1946년 6월 15일 부산에서 열린 순국열사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골 봉환회장에 참석한 김구(왼쪽 점선)와 방응모(오른쪽 점선). 아래 왼쪽은 임정 환국 소식을 크게 보도한 1945년 11월 25일 자 1면. 아래 오른쪽은 1931년 6월 5일 자에 임정 요인 연속 인터뷰의 첫 번째로 실린 김구 기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구는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조선일보와 인연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임정이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활동을 모색하던 1931년 5월 작가·기자 전무길을 상해에 보내 임정 요인들을 연속 인터뷰했다. 5회에 걸친 '재호(在滬) 선배들의 인상' 시리즈의 첫 번째가 '부동암(不動岩)인 김구씨'였다. 기사는 "씨가 상해에서 일반 동포에게 자부(慈父)와 같은 존경을 받는 것도 씨의 평생이 오직 민족을 위한 절개 있는 의지와 희생적 감정과 고행적 실천으로 일관한 까닭"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정국은 임정과 김구가 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미·소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양대 강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반도는 격동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임정과 김구의 노력은 그 충정에도 실현 가능성이 멀어져갔다. 조선일보는 김구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그러다 1948년 2월 3일 자 1면에 방응모 명의로 '김구 선생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 바 태도'라는 글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북(入北) 요청을 소련이 거부한 뒤였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애국심을 의심코자 하지 않는다. 선생은 우리와 운명을 같이할 인물이란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 남북지도자회의란 것은 연립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조선 지도자를 지명한다면 공산당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행복을 줄 것이며 과연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 현하의 세계대세로 보면 일종의 가공론(架空論)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구의 정치 노선에 대한 이견에도 노(老)혁명가에 대한 조선일보의 애정은 여전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한다'는 성명을 하자 2월 12일 자 1면에 전문을 게재했다. 1948년 4월 하순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렸을 때 성공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음에도 최성복·이동수 기자를 특파하여 신속하고 크게 보도했다.

김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존경이 또 한 번 드러난 것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 의해 피살됐을 때였다. 조선일보는 6월 27일 자부터 김구의 국민장이 끝난 뒤인 7월 7일 자까지 지면을 김구 서거 관련 기사로 가득 채웠다. 장례식이 치러진 날인 7월 5일 자 1면에는 '김구 선생 영여(靈輿)를 보내며'라는 사설과 방응모 사장의 조사(弔辭)가 실렸다. 사설은 "선생의 혼백이 떠나가시고 유해마저 떠나신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위하시고 민족을 위하시던 정신이야 어찌 우리에게서 떠날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애통해했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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