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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왜냐면] ‘키코 사건’ 가해 은행들의 억지 / 박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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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선아 ㅣ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해 12월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수출 중소기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이른바 키코 사건에 대해 손해배상조정을 결정했다. 키코 사건은 약 900개의 수출 중소기업이 환율 변동 위험에 대비한 통화옵션 상품에 가입했다가 최소 약 2조원대의 손해를 보고 도산하거나 경영권을 잃어버린 사건이다. 2013년 대법원은 불완전 판매를 인정하여 23개 피해기업에 대해 105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했으나, 대부분의 기업은 10년이 넘도록 적절한 피해 구제를 받지 못한 채 고통받아왔다. 금융당국의 방임,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사법기관의 무관심이 빚은 금융참사였다.

이번 조정 결정은 금융소비자 보호를 향한 의지이자 금융개혁정책의 성과다. 금융선진국인 미국, 영국 등의 은행들도 유사 사안에서 막대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한 사례가 다수 있다. 그런데 우리은행이 조정 결정을 수용한 것을 제외하면 산업은행과 씨티은행은 불수용 결정을 내렸고 나머지 신한, 대구, 하나은행 등은 의사결정준비 중에 있는 등 기대에 못 미치는 대응을 보이고 있다.

은행들은 분쟁조정 결정 수용이 배임죄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거나 은행법상 불건전한 영업행위 금지 조항에 해당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키코 사건에서 드러난 은행의 부도덕함, 불완전 판매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 그리고 이에 충실한 분쟁조정 과정 및 배상 비율 등 사건 배경을 두루 살펴보면 은행 쪽의 배임죄 주장은 법리상 근거가 박약하다. 대법원은 이른바 ‘경영 판단의 법칙’에 따라 배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데, 불완전 판매에 대한 피해 구제로서 금융당국이 내린 손해배상조정 결정의 수용은 배임죄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불건전 영업행위 금지 규정 주장은 견강부회가 따로 없다. 은행법은 은행 이용자에게 정상적인 수준을 초과하여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는 행위를 불건전 영업행위로 금지하고 있다. ‘정상적인 수준을 초과하여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조세포탈 지원처럼 원인이 불법적이거나 불건전함을 의미한다. 불완전 판매 행위로 인한 분쟁조정에 따른 이익 제공은 제공의 원인이 불법적이거나 불건전한 영업이 아니다.

은행들은 키코 상품을 팔던 때의 도덕적 해이 상태에서 한치도 나아진 것이 없다. 잘못된 금융관행에 휩싸여 금융개혁과 소비자 보호 요구를 외면하고 있지 않는지 성찰하여야 한다. 더욱이 키코 사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거래 문건에 포함된 사건이다. 불공정성과 사기성을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검찰도 당시 사기죄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공소시효가 남아 있으므로 재수사와 기소도 가능하다. 키코 사건에 대해서 은행들은 아직까지 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해 은행은 즉시 조정 결정을 수용하여 기업들의 피해 구제를 돕고 금융개혁의 길에 동참해야 한다. 조정안 수용은 단기적으로는 손실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은행의 공공성을 부각해 신용도를 높이는 이익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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