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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특파원 칼럼]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 황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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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황준범 ㅣ 워싱턴 특파원

“한국이 지금 난리인데 하필 이런 때에….”

미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동료·지인들에게 이렇게 위로 인사를 하던 게 불과 한달여 전이다. 미국의 코로나19 환자 수가 두자릿수에 머물던 때다. 그 뒤, 지구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은 코로나19 대응 성공사례가 됐고, 미국은 전세계 확진자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최다 감염국이 됐다. 3억3천만 미국 인구 가운데 90%에게 ‘집 안에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제 한국에서 “괜찮냐. 마스크는 있냐”는 연락이 오고 있다.

미국은 경제력, 군사력 세계 1위이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도 다수 배출한 나라다. 이런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테러가 아닌 바이러스에 뚫려 휘청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미국은 바이러스 창궐로부터 인류를 구하지만, 현실에선 집안 불 끄기도 바쁜 나라다. 세계 1등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첫손에 꼽히는 요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매일 백악관에서 1~2시간씩 생중계 브리핑을 하며 진두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 기간 “이건 독감 같은 것”이라며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저평가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조처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사태를 키웠다. “전시 대통령”을 자처한 그의 상대는 “보이지 않는 적”뿐만이 아니다. 그는 매일 언론, 민주당, 중국, 주지사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팩트를 언급하며 ‘사실’과 싸우고 있다. 전 세계적 위기 속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기대하기엔 미국 상황이 너무 어지럽다. 트럼프가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조금씩 인정하는 점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트럼프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도 무리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지난 1월까지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낮게 봤고, 코로나19 진단키트 제작에서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검사가 몇 주 늦어졌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브루스 에일워드 사무부총장은 “볼 수 없다면 막아내지도 못한다”며 검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근본적으로는 공공성 약한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다. 높은 의료 비용과 낮은 의료보험 가입률이라는 고질적 문제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민낯을 드러냈다. 미 정부가 지난달 긴급지원책을 내놓기 전, 미국에서 코로나19 검사 비용은 보험이 있으면 약 1500달러(약 186만원), 없으면 3700달러였다고 현지 소식통은 전한다. 급해서 응급실을 방문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3만5천달러 청구서를 받았다는 한 여성의 사례도 보도됐다. 미 정부의 검사비 지원은 임시처방일 뿐이다. 2018년 기준으로 미국 인구의 8.5%(약 2750만명)가 의료보험이 없다. 역시 아파도 참고 사는 약 1천만명(2017년 기준)의 불법 이민자까지 치면,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당국 집계보다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기민하지 못한 미국 행정체계도 문제다. 열이 나는 남편을 차에 싣고 병원에 갔더니 “보건소로 가라”고 하고, 보건소에선 상급 당국의 전화번호를 내주며 ‘핑퐁’하는 상황이 벌어져, 결국 지역 정치인에게 탄원해서 검사를 받았다는 사례도 있다. 미 정부는 코로나19 드라이브스루(차량승차) 검사소를 월마트 등의 주차장에 설치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들 점포 2만6400여개 중에 실제 설치된 곳은 3월 말 현재 5군데뿐이다. 진단키트 부족과 연방정부-주정부-민간의 느린 협업 등이 합쳐진 결과다.

미국은 이제 시작이다. 트럼프 말대로 빠르게 “터널 끝 빛줄기”에 도달해 회복할 실력을 갖춘 것인지, 세계의 리더로 계속 불릴 수 있을지 코로나19 사태가 시험하고 있다.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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