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버거 지음·쌤앤파커스 펴냄
'홀로코스트 생존자' 엘리 위젤
"침묵은 평화 위협하는 가장 큰 죄"
광기의 역사 증언·기록자 자처
억압받는 약자 대변에 평생 바쳐
'기억의 의무' 강조 메시지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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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권력의 정점에 서자 개인의 광기가 순식간에 나치 독일의 집단 광기로 증폭됐다. 유대인 혐오가 전염병처럼 유럽 전역을 뒤덮었다.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이 독일 바이마르 교외 ‘부헨발트(너도밤나무 숲)’라 불리는 곳으로 끌려갔다. 강제 노역으로 벌목이라도 하는 곳인가 싶었지만 울창한 숲을 연상케 하는 목가적 이름 뒤에서는 공장형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매일 수백 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병들어 죽었다. 잔인한 오락이나 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너도밤나무 숲. 그 곳은 아우슈비츠만큼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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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 야만의 현장을 증언하다
하지만 신이 인간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다. 몇몇은 비통과 야만의 현장인 부헨발트에서 살아남았다. 대신 생존의 무게는 막대했다. 사는 내내 광기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해야 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로서 그 무겁고 힘든 의무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이행한 사람이 바로 교수이자 인권운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작가 엘리 위젤이다.
신간 ‘나의 기억을 보라’는 위젤의 학생이자 조교였던 작가 아리엘 버거가 스승의 생전 가르침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하기 위해 그의 말과 글을 집대성해 정리한 책이다. 25년간의 기록과 5년 동안의 강의 필기, 스승과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을 현장감 있게 구성했다.
책 속의 울림은 깊고 크다. 2016년 위젤 교수가 타계했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 지도자와 지성인들이 일제히 그를 추모했던 이유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은 2018년 첫 출간과 함께 미국 전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전기 서적으로는 32년 만에 전미 유대인 도서상을 수상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 아닌 무관심”
저자가 존경하는 스승 위젤은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밤(1956)’을 비롯해 현대철학과 종교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낸 저명한 작가다. 하지만 단순히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 문제에만 천착하지 않았다. 억압과 차별, 혐오를 받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대변자 역할을 자처했다. 위젤은 “나는 침묵에 대항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희생자들이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을 때는 내 목소리를 빌려주려고 했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 저자는 행동주의자로서 수십 년 동안 캄보디아, 보스니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장으로 주저함 없이 달려가 연대의 힘으로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가차없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또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면서 “침묵이야말로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겁한 침묵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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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위젤이 가장 좋아한 일은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위젤의 보스턴대 강의실은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학생들의 국적은 물론 인종, 종교, 나이, 개인사가 모두 달랐다. 학생들은 위젤의 홀로코스트 생존 경험을 조심스레 물었고 처참한 상황에서 인간의 선택, 고뇌, 신앙적 갈등에 대해서도 수많은 질문을 했다. 위젤은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같이 고민하면서 스승으로서 경험을 나눴다.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가치를 항상 강조했다. 기술적 배움이 아니라 양심과 함께 성장하는 배움 말이다. 그는 나치 전범의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받고,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배웠던 사람이라는 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위젤은 학생들이 배움 끝에 도덕적 양심이 작동하고, 올바른 가치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또 그는 학생들에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광기와 증오가 싹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실의 무기인 말과 글을 비겁하게 사용해선 안된다고도 가르쳤다.
위젤은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학생들에게, 그리고 지금 책을 손에 쥔 독자에게 똑같이 강조한다. 역사의 참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역사의 목격자가 되어 기억하고 또 증언하라고 말이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지만 기억은 우리를 구원한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한결같다. 과거를 일깨워 미래를 위한 보호막으로 삼는 것이다.” 1만8,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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