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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은형의 애정만세] 영화관, 아니… 극장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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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감독 35명이 영화관에 대해 만든 단편영화를 묶었다. 영화 애호가에게 영화관은 가지각색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때론 영화보다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의 기획자 질 자코브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는 자신의 삶과 함께한 영화에 대한 소중한 추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유레카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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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게 무슨 영화든 극장이 나오는 순간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공기가 달라진달까. 기분 좋은 긴장과 흥분이 흐른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고, 극장은 그런 감독들의 애정과 설렘이 깃든 공간이라 그런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를 찍으니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또 내가 극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영화도 좋아하지만, 영화보다는 극장을 좋아한다. '영화관'보다 '극장'을 좋아한다. 그러니 '영화관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라고 쓰지 않고 '극장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라고 쓴 것이다. '영화관'이라고 하면 '극장'이 가진 정서가 온전히 담기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이를테면,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 나오는 미국의 미시간 극장 같은 곳 말이다. 영화에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번화했으나 이제는 폐허가 된 거대한 극장이 나온다. 얼마나 큰지, 얼마나 쇠락했는지 현재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미시간 극장은 실제로 있는 곳이었다. 영화에 슬쩍 흘러나오는 정보와도 일치한다. 1920년대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 건설된 미시간 극장은 한 번에 4000명이 넘게 입장하기도 하는 호황기를 누렸다고 한다. 오페라 극장의 느낌이 나는 이 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게 아니라 콘서트홀로도 쓰였다. 그랬다가 디트로이트의 몰락과 함께 주차장이 된 것이다.

미시간 극장 정도로 극적이지는 않지만 내게도 나의 어떤 순간들과 함께한 극장들이 있다. 극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옥외 계단을 통해 반 층을 내려가면 유리문으로 된 극장의 입구가 있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유리문을 통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관엽 식물과 거대한 양란이 보였다. 나는 영화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날 본 영화에 어떤 감흥도 없었지만, 딸의 생일 기념으로 이 영화를 고른 아빠 덕에 그 극장에 가게 됐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던 것이다. 그 영화는 내게 최초의 영화이기도 했다.

'쇼팽의 푸른 노트'였다. 영화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한 장면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에 왜 '푸른 노트'라는 제목이 들어가는지 아는 바가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서 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몸살에, 고열에, 기침에, 콧물에, 두통에 괴로웠고, 영화는 지루했다. 아주 끔찍한 경험이었고, 아주 끔찍한 생일이었다. 하지만 극장이라는 곳이 내가 일상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곳들과 아주 다른 곳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자주색 커튼을 열고 들어가 카펫 위를 걸었고, 직물 의자에 앉자 불이 꺼졌고, 말을 하던 사람들이 말을 멈췄고, 스크린이 점차 밝아져 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극장은 내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극장들을 '찍으며' 포스터를 보는 게 하교 코스였다. 극장 외벽에 걸린 포스터와 제목들을 보며 극장주의 취향과 극장이 소구하는 관객층을 짐작해보는 게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장을 지나치다 포스터의 짙은 파란색이 하도 강렬해서 다시 돌아와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중년인지 노년인지 모르겠는 남자가 다가와서 그 영화의 티켓을 주었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나온 프랑스 영화 '블루'였다.

'블루'는 내가 원해서 본 내 최초의 영화였다. 남자가 티켓을 주지 않았더라도 그 영화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그 극장과 '블루'와 나 사이에 끈이 생겨버렸다. 그 이후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이 글을 쓰다 까맣게 잊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누구였을까? 갑자기 영화를 보지 못할 사정이 생겨버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매일같이 상상하던 극장주?

이제 커튼을 열고 들어가는 극장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극장에 가는 일을 좋아한다. 예전의 극장과 달리 주로 쇼핑몰의 최상층에 있는 요즘의 극장,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라도 말이다. 옷 가게와 신발 가게, 화장품 가게, 식물 가게, 그릇 가게, 사탕 가게, 밥집과 분식집들을 지나 극장이 있는 층에 도달, 인형 뽑기 기계와 테이크아웃 커피 가게를 지나야 마침내 티켓을 발권할 수 있는 극장에 말이다. 멀티플렉스에 이르는 동선을 하나씩 되짚어보다가 나는 내가 극장에 이르는 이 길을 애정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사소하고 일상적이어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던, 그 영화관에 이르는 길을 말이다. 보행이 됐든, 배회가 됐든, 산책이 됐든.

"영화를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적은 없었다. 다만, 내가 함께 어울리고 싶었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수많은 광고를 보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영화비를 충당하고, 불량 식품을 사먹었다." 프랑스 영화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말이다. 단편영화들의 모음인 '그들 각자의 영화관' <아래 작은 사진> DVD에 들어 있는 부클릿에 이 문장이 있었다.

조선일보

극장에 가고 싶었던 날, 나는 극장에 가는 대신 2008년에 극장에서 보고 좋아서 DVD로 사뒀던 이 영화를 재생시켰다. 이 영화는 5개의 대륙, 25개의 나라, 35명의 감독이 만든 '영화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기획한 질 자콥은 이렇게 적었다. "영혼과 마음에 큰 영감을 남기는 순간으로 다가왔던 영화관에 대한 기억들을 담았다. 전 세계의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거장들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함께했던 영화에 대한 소중한 추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밍량의 이 말이 가장 좋았다. "어린 시절에 찾았던 영화관들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철거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나를 찾아와 마치 오래전 따뜻했던 추억을 속삭이듯 내 영혼을 뒤흔들곤 한다."

나는 '블루'를 본 날 이후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기 시작했다. 그 극장만 갔다. 혼자 영화를 볼 때는 말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극장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또 이렇게 아주 가끔 나를 찾아와 그때의 기억들을 상영해주고, 나는 다시 그 직물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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