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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정동현의 pick] 담백한 집밥도 하루 이틀이지… '악센트'줄 떡볶이·게장 택배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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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밀키트 편

조선일보

가율푸드에서 판매하는 박민 요리사의 '가율 순살 양념게장'.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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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시절이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은 지 몇 달이 됐다. 지난 연말에 곧 보자며 손을 흔들었는데 이제 까마득한 일이다. 섭취 칼로리는 절대적으로 집밥에 의지한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릴레이도 하루이틀이다. 창작의 벽에 부딪힌 작가처럼 아이디어가 점점 고갈됐다. 인터넷을 켰다. 시인이 마침표 하나에 며칠을 고민하듯 장고했다. 김치 하나도 네다섯 회사 제품을 먹어봤다. 매 끼니 떡볶이가 나왔다. 택배 박스가 이삿짐처럼 집 앞에 쌓였다. 위장을 볼모로 잡고 혀를 학대했다. 마침내 담백하다 못해 싱거운 나날에 악센트를 줄 만한 음식을 몇몇 골랐다.

시작은 '미로식당 떡볶이'였다. 서울 창천동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면 '미로식당'이란 작은 주점이 있다. 이곳에서 비탈길 올라온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알음알음 내던 떡볶이가 유명해지더니 제품까지 나왔다. 소스는 액상이고 떡은 밀떡이다. 맛의 방점은 국물에 찍힌다. 단맛이 강한데 그렇다고 부담스럽지 않다. 나긋나긋 살랑살랑 고양이가 꼬리를 흔들 듯 혀와 목구멍에 스르르 흘러 들어가는 고급스러운 단맛이다. 먹다 보면 떡볶이 국물까지 마시려는 사람이 꼭 생긴다. 누가 떡볶이가 자극적 음식이라고 했던가? 발랄함을 지나 우아해진 그녀들에게 더욱 어울리는 맛이다.

떡볶이를 먹다 보니 김치가 아쉬웠다. 집에 늘 있는 평범한 김치는 냉장고 구석으로 밀었다. 선택은 이름부터 화끈한 '선화동 매운 실비 김치'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은 신중하게 고민하고 주문하라는 경고 문구에 웃음기는 없었다. 하지만 '매운 것 못 먹어?'라는 말을 조롱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한반도 거주민으로서 당당히 결제 버튼을 눌렀다.

두꺼운 고추 '다대기(다진 양념)'를 이불처럼 덮고 있는 김치 포기의 자태는 강렬했다. 라면, 짜장면, 카레와 함께 먹으라는 지극히 당연한 업체 설명대로 한편에 라면을 끓여놨다. 전쟁 같은 취식이 시작됐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액젓의 퀴퀴한 냄새와 어우러져 혀를 쥐어짜고 위장을 푹푹 찔렀다. 라면을 곁들이니 매운맛은 '묻고 더블'이 됐다. 다이내믹 코리아, 위기 극복이 취미인 나라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런 음식을 즐기니 나라의 정체성에 불굴의 의지가 달라붙는 것 같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김치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식사가 아니라 스포츠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이제 자극을 떠나 이국적인 음식을 찾았다. 연남동에서 태국 쌀국수로 긴 줄을 세우는 '소이연남'의 쌀국수 차례였다. 건더기까지 함께 냉동한 육수를 냄비에 끓였다. 건면은 조리법에 나온 대로 1분 30초 삶았다. 봉지 라면보다 조리가 쉬웠다. 육수와 면을 합치고 동봉한 튀긴 마늘 분말을 뿌렸다. 연남동 사거리에서 맡던 냄새가 났다. 매장에서 내는 육수를 그대로 얼려 맛에 차이가 없었다. 달짝지근한 배경에 태국 액젓과 소고기 사태살이 어우러진 굵직한 맛이 출렁거렸다.

그러고 흰쌀밥으로 돌아왔다. 하얀 김이 오르는 밥 옆에는 '가율'이란 별칭을 쓰는 박민 요리사의 순살 양념 게장을 놓았다. 목포 여행을 가면 꼭 찾아 먹던 게장이었다. 뚜껑을 열고 슬쩍 보면 살과 양념이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퍼 올리니 반투명한 게살이 비쳤다. '쌀밥+게장=식욕 폭발'이라는 공식에는 예외가 없었다. 싱거운 농담처럼 잔잔히 깔린 매운맛 위에 단 게살과 고소한 향기가 재잘거리듯 사이좋게 어울렸다. 하얀 열기가 올라오는 밥에 조금 올려 먹다가 이내 양푼을 찾았다. 밥을 붓고 숟가락으로 게장을 펐다. 김을 부수고 깨도 넣었다. 무의식 중에 참기름도 몇 방울 뿌린 듯싶다. 이성의 끈을 놓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다가 빈 그릇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말았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때 상실은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언제까지 무기력에 빠질 수는 없다. 대신 마음을 돌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고 흘려버리던 일상의 흐름을 살펴본다. 떡볶이, 김치, 쌀국수, 하얀 밥, 그 위에 올라간 꽃게장, 고소한 향기. 그런 것이 위안이 된다. 이 시대가 알려준 또 다른 사는 맛이다.

가율푸드: 가율 순살 양념 게장 9000원(150g)

마켓컬리: 소이연남 쌀국수 7500원, 미로식당 떡볶이 4500원

선화동매운실비김치: 선화동 매운 실비김치 2만원(1.3㎏)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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