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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2월 부산여행 안내가 마지막" 중국어 가이드의 막막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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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생존기]

중국어 관광가이드 P씨의 코로나19 일상

프리랜서 신분이어서 정부 지원에서 배제

“2월 초 이후 수입 없어, 건강보험도 부담”

관광업계는 붕괴 직전이다. 예년 같으면 한창 바쁠 계절인데, 업계 종사자 모두 손을 놓고 있다. 모두가 힘들다지만 관광업계에서 가장 곤란한 이들이 관광통역안내사, 즉 관광 가이드다. 관광산업의 최전선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허울 뿐이다. 프리랜서 신분이어어서 정부 지원금도 해당사항이 없다. 15년 차 중국어 안내사 P(39)씨의 막막한 일상을 들었다.

중앙일보

관광통역안내사 P씨가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벚꽃이 만개한 지금이 한창 바쁠 때인데 덕수궁에 꽃이 핀지도 몰랐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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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일이 끊겼을 것 같다.

A : 2월 초, 말레이시아 단체 관광객의 부산 여행을 안내한 게 마지막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2주간 자가격리를 한 뒤로 쭉 집에서 지내고 있다.

Q : 단체가 없으면 수익이 전혀 없나?

A : 그렇다. 특정 여행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지만, 월급을 받는 직원 개념이 아니다. 행사마다 일당을 받는다. 다른 업종의 프리랜서처럼 매년 5월 종합소득세 3.3%를 내고 있다. 회사에서 4대 보험을 내주는 안내사는 거의 없다. 일당을 모아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납부한다. 일이 끊기니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안내사는 일당을 받는다. 경력·언어에 따라 하루 10만~30만원 받는다. 일당 없이 쇼핑 수수료에 의존하는 안내사도 많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8년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소지자는 3만1790명이다. 중국어 자격증 보유자가 1만2186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일본어(1만877명), 영어(7664명) 순이다.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는 실제 활동 중인 안내사를 5000명 이하로 추정한다.

Q : 3월 30일 정부가 프리랜서 지원책을 발표했는데.

A : 뉴스를 봤다. 우리도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4대 보험 같은 안전망이라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었다. 여행사 직원은 휴직수당을 받거나 실업급여라도 챙길 수 있다. 소속이 없는 우리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함께 관광업에 종사하고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여행사 직원만 챙기는 것 같다. 심리적 박탈감이 크다.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는 2월 26일 담화문을 발표한 바 있다. 안내사가 정부의 관광업계 지원 사각지대에 있으니 긴급 생계 지원금과 마스크·손 소독제 등 생필품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3월 22일에는 관광통역안내사를 ‘특수고용직’으로 인정해달라고 청와대 청원을 올렸다.

Q : 문체부·관광공사 같은 관광 당국에서도 지원이 없나.

A : 없다. 관광통역안내사는 국가 공인 자격증을 취득한 전문 인력이다. 늘 우리가 한국의 얼굴이라 생각하며 현장을 지킨다. 관광지에서 해설만 하는 게 아니다. 손님이 아프면 응급실에 데려가고 소매치기를 당하면 경찰서에 함께 간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을 24시간 돌본다는 심정으로 일한다. 정작 우리는 국가의 돌봄을 못 받는 것 같다. 감염병이나 외교 분쟁으로 위기를 겪을 때면 더 소외되는 것 같다.

Q : 당장 생계가 막막할 것 같다. 다른 일을 알아보진 않았나.

A :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버티고는 있다. 동료 가운데 다른 일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산업 전반이 위축돼 있어 마땅히 할 일도 없단다. 자부심을 갖고 15년간 해온 일이다. 하루아침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중앙일보

관광통역안내사 P씨는 외국 관광 단체가 오면 경복궁 아니면 덕수궁을 꼭 들른다고 했다. 최승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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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코로나19 확산 이전은 어땠나.

A :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2015년 메르스, 2016년 중국 한한령(限韓令)의 여파가 계속 이어졌다. 중국 시장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지만, 덤핑 경쟁이 심해져 수익이 많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대만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시아의 중국계 관광객을 주로 안내하고 있다.

Q :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A : 가이드 일이 돈을 많이 벌긴 어렵다. 그냥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다. 한국을 잘 모르던 손님이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고 할 때, 자국으로 돌아간 뒤 감사 인사를 전해올 때 뿌듯하다.

Q : 코로나19가 장기화할 수도 있다. 대비책은?

A :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해이해지지 않으려 한다. 책 읽고 넷플릭스 보면서 언어와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위기 때 잘 버틴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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