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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단독 인터뷰] 48년 역사 ‘영동 스낵카’ 폐업… “서울 역사 담은 스낵카는 보존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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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스낵카’ 2대 사장 박윤규씨, 지난 1일 마지막 장사
"한티역 정착 후 2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다"
300원짜리 우동·김밥 메뉴 세월과 함께 12개까지 늘어
‘서울시 미래유산’ 지정됐지만… 오는 20일 폐차 위기

"강남이 허허벌판인 시절부터 여길 지켰던 스낵카인데 폐차장으로 가야할 신세가 됐네요."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동 스낵카’ 사장인 박윤규(62)씨가 스낵카를 손으로 쓸어 만졌다. 박씨 손의 주름처럼 스낵카로 쓰인 버스도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전국에 남은 두 대의 스낵카 중 하나인 영동 스낵카는 지난 1일 문을 닫았다. 창업한지 48년, 지금의 버스로 옮긴 지 35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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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영동 스낵카 앞에 박윤규 사장이 ‘서울시 미래유산 인증서’를 들고 서 있다. /김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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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카는 대형버스를 개조해 만든 이동식 식당이다. ‘푸드 트럭’의 원조격이다. 운전석은 ‘주방’으로 쓰였고 버스 좌석이 놓인 곳은 손님들의 식사공간 역할을 했다. 1972년 고철 버스를 개조해 시작한 ‘영동 스낵카’는 서울의 개발 현장 곳곳을 누비며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주로 공사현장의 건설 노동자가 손님이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은 당시 300원짜리 우동과 김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아시안게임을 앞둔 1985년. 오래된 스낵카의 외형이 탐탐치 않았던 정부는 스낵카 전용 버스 13대를 위탁 제작해 보급했다. 영동 스낵카도 새로운 스낵카로 옮겼다. 이들 스낵카들의 차량번호가 모두 ‘86’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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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동 스낵카 내부. 버스 좌석 대신 간이 의자와 벽걸이 식탁이 놓여 있다. /김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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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스낵카의 초대 사장은 이재영(93)씨다. 이씨는 조카인 박씨에게 "몇달만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1982년 시작된 박씨와 스낵카의 인연은 이후 38년 동안 이어졌다. 박씨는 "당시 군 제대하고 24살이었는데 토목 기사 자격증이 있어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갈 생각이었다"며 "가기 전까지만 삼촌을 도우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평생의 업이 됐다"고 했다.

종업원이던 박씨는 1993년 삼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영동 스낵카의 2대 사장이 됐다. 홀로 장사를 하게 되면서 ‘유랑 영업’을 접고 지금의 한티역 8번 출구 인근의 나대지에 정착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는 공터였지만 강남 중심에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장사하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이후 27년 동안 박씨는 단 하루도 영동 스낵카의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한다. "박리다매를 전략으로 세웠으니 매일 손님을 맞이해야 수지가 맞아서 처음엔 연중무휴하기로 장사를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난 뒤에는 매일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어서 문을 닫기가 미안해 휴일 없이 영업을 하게 됐죠." 박씨의 말이다.

저렴한 가격, 언제든지 찾을 수 있고 주차장도 넉넉한 영동 스낵카는 택시기사들의 ‘성지(聖地)’가 됐다. 박씨는 "서울에서 택시를 1년 이상 운전한 사람이면 누구나 영동 스낵카를 알 것"이라고 했다. 손님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동 스낵카 손님 중 절반 이상이 20년 이상 된 단골이다. 손님들은 꼭 식사가 아니더라도 잠시 쉬어가기 위해 영동 스낵카를 찾았다. 과로로 쓰러진 손님을 데리고 응급실을 갔던 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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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스낵카’의 메뉴판. 우동과 김밥, 어묵뿐이던 메뉴판은 세월과 함께 12가지로 늘었다. /김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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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함께 스낵카의 메뉴도 다양해졌다. 우동, 김밥, 어묵 단 세개뿐이었던 메뉴판에는 돼지불백과 짜장밥 등이 하나씩 추가됐다. 마지막 영업날에는 메뉴가 12개였다. 박씨는 "경제 성장과 함께 손님들의 소득 수준도 높아지고 입맛도 달라지면서 다양한 음식을 팔기로 했다"며 "‘요즘 해장국집이 장사가 잘 되더라’라는 손님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메뉴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동 스낵카는 지난 1일 문을 닫게 됐다. 영동 스낵카 터의 개발제한이 해제되면서 상가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기는 방안도 고민해봤지만, 지금처럼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제공하기 어려워 박씨는 결국 폐업을 결정했다. "원래 지난달 31일에 문을 닫으려고 했는데, 그날도 아침부터 손님들이 찾아줘서 하루 더 영업했어요.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주변 동사무소랑 파출소에 ‘작별 떡’을 돌리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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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스낵카’의 번호판. 1985년 지금의 버스로 옮긴 뒤 교체 없이 35년을 함께 했다. /김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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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무엇보다 폐업과 함께 ‘영동 스낵카’를 폐차장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을 아쉬워 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됐지만 보존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 영동 스낵카와 함께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던 ‘콜럼버스 스낵카’도 같은 이유로 2017년 40만원에 폐차됐다. 이제 남은 스낵카는 ‘강남 스낵카’ 한 곳뿐이다.

박씨는 서울시에 보존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박씨가 "스낵카를 기증할테니 시가 보존해달라"고 제안했지만 서울시 측은 제대로된 답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공영주차장 한 켠에 세워두는 방법도 제안했지만, 관할 업무가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는 20일까지 보존 공간을 찾지 못하면 영동 스낵카는 폐차장에서 추억을 뒤로 하고 사라지게 된다.

박씨는 "지난해 미래유산이라고 보수유지비를 지원해준다던 서울시가 막상 폐업 후 기증한다고 하니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며 "서울시의 개발과 함께 한 스낵카를 보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권오은 기자(oheun@chosunbiz.com);김송이 기자(grap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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