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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뉴욕에 뜬 저 배, 병원선인가 유람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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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대처 위해 軍에서 파견

뉴요커들 몰려나와 환영했지만 실제로는 일반 환자들만 진료

1000개 병상에 환자는 20명뿐

"해군이 뉴욕 우롱" 비판 커지자 뒤늦게 '코로나 병상' 전환 검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의료 시스템 마비 상태에 빠진 미국 뉴욕을 돕겠다며 미 해군 함정(USNS) 병원선 '컴포트'함<사진>이 뉴욕항에 정박한 건 지난달 30일이었다. 10층 빌딩 높이, 1000개 병상 규모의 이 병원선이 온다는 소식에 뉴요커들은 큰 기대감을 가졌다. 배가 허드슨강 물살을 가르며 위용을 드러내자 뉴요커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도 잊고 몰려나와 구경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직접 버지니아에서 이 배를 전송했고, 뉴욕 주지사와 뉴욕시장도 배맞이를 하러 나왔다.

조선일보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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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해군 병원선이 일주일가량 받은 환자는 불과 20여 명이었고, 그나마 코로나 환자가 아닌 일반 환자였던 것으로 드러나 미국이 들끓고 있다. 애초부터 밀폐된 병원선 특성에 따라 전염병 환자는 받을 수 없게 돼 있었는데, 그런 정보도 제대로 공유하지 않은 채 배부터 파견해 벌어진 일이었다. 우왕좌왕하면서 붕괴되고 있는 미국 의료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란 지적이 나온다.

현재 뉴욕의 병원들은 넘쳐나는 코로나 환자로 회의실과 구내식당, 복도와 주차장까지 병상으로 채우고 있다. 센트럴 파크에 야전 병원을 세우고, 영안실이 부족해 냉동 트럭도 동원하고 있다. 인공호흡기가 부족해 두 환자에게 번갈아 끼우는가 하면, 10센트(약 120원)짜리 검체용 면봉이 떨어져 직접 만들어 쓰기도 한다. 미국 확진자는 5일(현지 시각) 현재 33만명, 사망자는 1만명에 육박한 가운데, 뉴욕주에서만 확진자 12만명, 사망자는 4000명을 넘어섰다.

미 해군 병원선은 이런 뉴욕의 의료 과부하를 덜겠다며 파견됐다. 그런데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2일 "컴포트함에 환자가 달랑 3명뿐"이라고 처음 보도했다. "병상 1000여 개는 텅텅 비었고, 방역 장비를 갖춘 군의관 등 선원 1200명도 일이 없어 놀고 있다"고 했다. "해군이 뉴욕을 우롱했다"는 비난 여론이 폭발하자, 해군은 "컴포트 선상의 환자는 3명이 아니라 20명"이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20명이란 숫자도 실망과 분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해군이 까다로운 병원선 승선 기준과 행정절차를 손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NYT는 전했다. 컴포트함은 처음부터 일반 환자들을 받기 위해 파견됐다. 밀폐된 선내라 전염병 환자는 승선이 원천 금지됐다. 이를 몰랐던 코로나 증상 환자와 의료진이 구급차를 타고 컴포트함에 갔다가 일반 병원으로 되돌려 보내진 일이 수차례 있었다고 한다.

뉴욕은 거리 두기 지침으로 교통사고나 총기 사고가 확 줄어 일반 응급 환자도 급감한 상황이다. 그런데 컴포트 측은 일반 환자조차 '시내 병원에서 먼저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고 의사 소견서를 받아오라'며 돌려보냈다. 또 외상을 입은 젊은 군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라며 기저 질환이 있는 고령 환자도 받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런 식의 기준이 40가지나 됐다. 영국 가디언은 "컴포트 사태는 미국의 코로나 대응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해군은 3일 "컴포트함이 일반 환자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승선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했다가, 5일 아예 이 배를 코로나 환자 전용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육군도 맨해튼의 재비츠 컨벤션 센터에 만든 병상 3000개의 야전병원에 일반 환자만 받으려다 코로나 병원으로 바꾸기로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미군은 전사자 신원 확인과 장례를 담당하는 영안부대까지 뉴욕에 급파하는 등 '전시 총동원 체제'로 가고 있다. 제롬 애덤스 미 공중보건단장은 5일 "1941년 진주만 습격, 2001년 9·11 테러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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