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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동서남북] 아무도 안 뽑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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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도둑 또는 정치 거지

누구도 뽑고 싶지 않지만 백지 투표 해도 응징 못 하니 最惡 빼고 次惡 찍을 수밖에

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 차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 있다. 6년 전 필자가 쓴 칼럼이 신문에 실린 날이었다. 선관위 소속이라고 밝힌 남자는 칼럼 내용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 했다. 헌법기관에서 걸어 온 전화를 받으니 살짝 긴장했다.

해당 칼럼 제목은 '의원 안 뽑는 선거 제도'. 투표율과 관계없이 최다 득표 후보가 당선되는 선거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글이었다. 당시 재·보궐선거에서 어느 지역구 투표율은 22.3%, 당선자는 그중 60.3%를 득표했다. 꽤 높은 득표율이었지만 실제 지지율(투표율×득표율)은 13.5%에 불과했다. 지역구민 86.5%가 뽑지 않았는데도 해당 후보가 지역을 대표한다면 국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해야 하는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실제 지지율이 너무 낮은 경우 해당 지역구 의석을 비워두는 '의원 궐석제(闕席制)'를 도입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전화선 너머 선관위 남자는 "의원 궐석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가 있느냐" 물었다. 오히려 필자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선관위는 '선거와 국민투표의 공정한 관리 및 정당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헌법 제114조) 설치한 기관이니까. 물론 선관위도 국민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이른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당초 중앙선관위가 국회에 개정 의견을 낸 제도였다. 전화 질문엔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의원 궐석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있는지는 과문(寡聞)하여 몰랐다.

의원 안 뽑는 선거라는 상상은 문학에서 이뤄졌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해냄)는 투표소 풍경으로 시작한다. 수도 지역 선거에서 백지 투표가 70% 쏟아진다. 법에 따라 재선거를 치르지만 백지 투표 비율은 83%로 더 올라간다. 초유의 사태에 당황한 정부는 계엄 선포를 검토하고 비밀정보부는 '주민 다수를 감염시킨 도덕적 전염병'의 원인을 조사한다. 사라마구는 "정치가들은 백지표보다 기권표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기권표야 뭐라고 둘러대도 상관없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든다고 하지만, 백지표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것이라는 점을 나는 믿는다"고 했다.

기권표는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 국민 의사에 반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지 투표는 유권자의 분명한 의사 표현으로 봐야 옳다. 이미 우리도 투표율이 낮으면 무효를 규정한 입법도 있다. 현행 주민투표법은 투표율이 3분의 1에 이르지 못하면 아예 개표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에선 백지 투표 비율이 모든 후보의 득표율보다 높더라도 최다 득표자가 당선된다.

안타깝지만 관련 제도가 없으니 백지 투표는 정치를 응징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처리하고 위성 비례 정당 내세워 제가 만든 법을 누더기로 만들어서라도 정권을 차지하려는 '권력 도둑'과, 정권의 실정(失政)에서 반사이익을 노릴 뿐 이렇다 할 미래 전망 없이 표만 구걸하는 '정치 거지'를 비롯해 48㎝ 투표용지 어느 곳에도 깃들지 못하는 이른바 '무당파(無黨派)'는 백지 투표를 해도 의사를 관철할 수가 없다.

2400년 전 플라톤은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서광사 '국가' 101쪽)이라 했다. 이를 번안한 것으로 보이는,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한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이러니 어찌하나. 최악(最惡) 빼고 차악(次惡)을 뽑을 수밖에.

[이한수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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