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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목멱칼럼]내 탓이오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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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세계경제는 ‘신중상주의’ 흐름이 거세지며 국가 간 적대행위가 1, 2차 세계대전 이전 모습과 흡사해지고 있다. 한국경제는 성장잠재력이 시나브로 저하되면서 역동성을 잃어가는 모양새를 벌써부터 보여 왔다. 그 와중에 기후변화 때문인지 몰라도 신종 역병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리무중 상황이다.

이데일리

거세게 몰아치는 이 삼각파도가 언제 가라앉을지, 어떻게 헤쳐 나갈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사방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중지를 모아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자화자찬 아니면 “네 탓이다”라며 대립하면서 경제순환의 핵심 요소인 ‘신뢰’의 적자는 더 커지고 있다.

2015년에 빌 게이츠는 “전염병 확산은 이미 전시 상황이다. 세계가 경계해야 할 건 핵미사일보다 미생물 재난이다”라며 세균으로 약 10억 명 이상이 희생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실로 바이러스 역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얼마나 인류를 괴롭힐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안중근 의사는 평소에도, 옥중에서도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닥친다”(人無遠慮 必有近憂, ‘논어’ 위령공 편)는 휘호를 자주 써 남겼다. 가계나 기업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멀리 보고 미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라는 당부다.

지도층 인사들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남을 탓하기 시작하면 부지불식간에 세상인심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어서 공동체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순간의 이익을 위하여 원칙을 저버리면 당장에는 쪼그마한 재미(?)를 볼지 모르지만, 그 변칙과 편법은 사람들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에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원리원칙 없이 다투다 보면, 오십 보 도망친 자가 백 보 도망간 자를 비겁하다 꾸짖거나, 백 보 도망간 자가 오십 보 도망간 자를 겁쟁이라고 몰아세우는 힘자랑이 벌어진다. 정의를 깔아뭉개고 불의를 태연히 바라보는 꼬락서니가 되어 사회는 갈등과 대립의 도가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로부터 지도자는 “백성들을 위해 마음 쓴다”고 말하지만 대개 헛말에 그치기가 쉽다고 한다. 맹자가 위나라 양혜왕(梁惠王)에게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는 길을 아뢰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거리에서 굶어 죽는데, 왕이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년사(年事, 흉년) 때문이다’(塗有餓莩而不知發 非我也 歲也, ‘맹자’ 양혜왕 편)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나서 ‘내가 죽인 것이 아니고 창칼이 그랬다’(人而殺之曰 非我也 兵也)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년사에 핑계대지 않으시면 천하 백성들의 인심을 다 얻을 것입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스스로 노력하기보다 세상을 탓하는 풍조가 풍미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 ‘내 탓이오’ 운동이 일어났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며 회개하는 ‘고백 기도’가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탓이오’ 표어를 자신이 볼 수 있는 운전석 앞이 아닌 차 뒤꽁무니에 달고 다녔다. 뒤에서 표어를 읽는 사람들을 향하여 ‘네 탓이다’ ‘네 탓이다’라고 꾸짖는 격이 되었다. 기도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해야지 남을 탓하는 마음으로 하는데, 신께서 소원을 들어 주실 리 만무하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변명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의 본심을 믿으려는 마음자세는 감정의 동물인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성정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부를 막론하고 어떤 실책이라도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되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비로소 신뢰 기반이 다져지기 시작한다. 한국경제를 휩싸고 도는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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