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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경향의 눈]윤석열 총장의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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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첫 단락은 강렬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중략)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시인은 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한 상황을 그린 것이나, 내게는 감추고 싶은 것들이 드러났을 때의 심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읽힌다. 그 4월이 왔다. 선거의 달이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열기는 예년 같지 않다. ‘일시멈춤’ ‘거리 두기’ 등으로 국민은 불편하고, 경제도 어렵다. 이 와중에도 뜨거운 이름들이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경향신문

‘조국 사태’는 한국 사회의 홍역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검찰은 ‘피의사실 유포’ ‘별건수사’ 등의 비난에도 그야말로 탈탈 터는 수사로 조 전 장관은 물론 부인, 동생, 조카 등을 법정에 세웠다. 검찰 수사가 얼마나 공포스러웠으면 “무소불위 검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여론이 드세지면서, 되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검찰개혁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기도 했다. 반면, 국민들은 힘센 자들이 공유해온 권력의 대물림 과정을 보고 분노했다. 주거니 받거니, 자녀의 ‘스펙 쌓기’가 그렇게 쉽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경악했다. 누군가는 감춰졌으면 했던 일들일 것이다. 이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 ‘윤석열 검찰’에 지지와 응원이 이어졌다.

‘조국 사태’는 진보의 균열도 불렀다. 과도한 ‘조국 구하기’에 실망한 이들이 하나둘 ‘진영의 담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덕적 흠결이 분명한 상황에서 ‘조국 수호’에 몰입하는 듯한 정권의 모습에 실망한 결과일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저서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를 통해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선 핵심에 집중하는 최소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강 교수는 “최소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e메일로 답했다. “검찰개혁에 동의할 사람이 절대다수임에도 특정 인물을 내세워 그 사람이 아니면 검찰개혁을 못한다는 식의 접근법은 최소주의와는 거리가 먼 도발적 여론몰이다. 진영 간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민에 집중하라”는 주문이다.

윤 총장에게도 ‘4월’이 왔다. 선거를 앞두고 장모와 부인 비리 의혹이 터지고, 최측근 현직 검사장이 언론과 유착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야당은 연일 “윤석열 때리기” “민주당이 조국 살리기에 나섰다”며 비판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조국 사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표심을 얻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제기된 의혹들은 하나같이 사안이 중하다. ‘300억원대 사문서 위조·행사’ ‘동업자의 수익 가로채기’ 등 보통사람이라면 꿈도 못 꿀 일들이다. 그 과정에서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늑장수사’ 의혹 등은 사실이라면 조국 사태 때 국민적 분노를 샀던 ‘합법을 가장한 특권의 향유’와 다를 바 없다. 조국 사태 내내 의심받아온 검찰과 특정 언론의 유착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야당이나 보수언론의 주장처럼 ‘정치적 프레임’으로 폄훼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들 사건을 대하는 윤 총장의 태도는 석연찮다. 그는 검·언 유착 의혹에 대한 대검 감찰본부장의 감찰 개시 요구에 반대했다. 시민단체의 고발까지 있는 사안이 아닌가. 그렇다면 감찰은 수사에 앞서 검찰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신중론을 폈다. 가뜩이나 윤 총장 가족 관련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장모에 대한 기소는 사건 발생 7년 만에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연루 의혹이 제기된 윤 총장 부인은 검찰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100명의 검사·수사관을 동원, 70여곳을 압수수색하며 밀어붙이던 조국 수사와는 사뭇 다르다. 급기야 검찰 수사관이 내부통신망에 수사 공정성을 이유로 윤 총장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일도 벌어졌다.

윤 총장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정농단 수사 등을 통해 보여준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함’ ‘권력에 굴하지 않는 수사’는 국민 모두가 아는 ‘윤석열의 원칙’이다. 대통령에 대한 ‘충심(忠心)’ 발언을 통해 “대통령 측근 비리는 읍참마속하기 어려워, 정확하게 수사해서 도려내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검찰’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측근 비리는 도려내야 한다. 그게 검찰이 지켜내야 할 ‘윤석열의 원칙’이다.

시인 신동엽의 4월은 ‘또 다른 4월’이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했다. 거짓과 불의를 벗어던지고, 정의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윤 총장의 4월은 엘리엇의 4월이 아닌, 신동엽의 4월이 돼야 한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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