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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임의진의 시골편지]홀쭉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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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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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가게들이 어렵고 지갑이 홀쭉한 시대다. 한 젊은이가 위조지폐를 만들어 어리숙한 동네 할머니의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물건을 쪼끔 사고 5만원짜리 위조지폐를 내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삐뚤빼뚤 4만원이라 적힌 지폐를 꺼내더니 거스름돈이라며 내밀더란다. 할머니를 우습게 여기면 큰코다친다. 우리 동네 할머니들만 봐도 단톡방에 이모티콘을 자유자재 구사하고 장남이 가짜뉴스 올리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 꾸짖기도….

엊그제 일이다. 국수가게에서 친구랑 밥을 먹고 나왔는데 우체국에서 택배 계산을 하려다보니 지갑이 주머니에 없다. 혹시나 해서 국수가게에 전화했더니 테이블에 그대로 있다는 거다. 지갑에 명함이라도 넣어두어야 하는데, 수염 얼굴이 명함인 뉴욕 노숙인 스타일. 돈도 좀 들어 있었다면 지갑을 못 찾았을까. 우리나라 사람들 정직하고 도덕성도 높은 편이다. 일부 때문에 전부를 비하해선 곤란하다. 해외를 여행해보면 안다. 손에서 떠난 물건은 남의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눈앞에서도 돌려주지 않는다. 가난은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가난이 폭발하면 유혈 충돌이 일어난다.

홀쭉 지갑을 불룩 지갑으로 만들 마술이 시방 필요하다. 임대료가 밀리고 쌀이 떨어진 집들이 있다. 재난소득은 무차별로 나누되 넉넉한 집안에선 기부를 하는 문화가 정착했으면 싶다. 장차는 기본소득의 시대가 와야 한다. 한 해 농사 지어봤자 약값, 입원비 충당하느라 ‘쌤쌤’인 농민들을 봐도 그렇다. 쌀과 배추와 양파, 고추와 무와 마늘이 없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 예술가들도 그래. 우리 사는 골목에 집을 둔 예술가들이 없다면 마을살이가 얼마나 밋밋할까. 대다수 예술가들은 그러나 궁핍하다. 글로 벌어먹고 사는 작가들은 정말 열 손가락 안. 예술가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는 정책이 뒤따라야 하겠다.

잠깐 지갑을 잃어버렸던 국수거리에 꽃들이 만개했다. 지갑이 꽃송이로 불룩해지는 상상을 했다. 꽃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서 꽃잎 한 장 두 장 지폐 삼아 국수를 사먹는 꿈을 꾸어본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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