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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하나의 유럽이 바이러스 앞에서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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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탈리아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사용되는 로마 퀴리날레 궁전에서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직원들이 정문 발코니에 유럽연합(EU)의 공식 깃발과 이탈리아 국기를 조기로 게양하고 있다. /사진=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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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287] 해묵은 이탈리아의 반(反)유럽연합(EU) 정서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증폭되고 있다. 지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정위기 당시 독일을 비롯한 EU 내 북유럽 국가들에서 가혹한 구조조정 조치를 당했다는 피해 의식이 있는 이탈리아가 이번 코로나19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또다시 북유럽 국가들에 원한을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이탈리아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EU에 속해 있는 것이 이탈리아에 유리하지 않다'는 응답이 67%로 나타났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18년 12월의 47%에서 크게 상승한 수치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다른 EU 회원국들에서 신속히 지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동안 독일 등 EU 소속 북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 위기를 넘기기 위한 채권 발행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탈EU'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마저 "EU가 이탈리아와 연대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유럽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난달 코로나19가 남유럽을 휩쓸고 있던 시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9개 유로 국가들은 '코로나 채권' 발행을 촉구하는 공동 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이 조성하고자 하는 코로나 채권은 독일을 포함해 모든 유럽 국가가 공동 보증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이 방안의 걸림돌이 독일 출신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다.

상황이 이렇자 카를로 칼렌다 EU 이탈리아 상임 대표는 FT에 "'우리가 왜 EU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필요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도날트 투스크 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2010년 유로위기 때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현재가 더욱 위험하다"고 밝혔다. 지금과 같은 독일과 이탈리아 간 갈등은 2010~2012년 유로존 재정위기에서 출발했다. 당시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 본드를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했다.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2년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런 채권은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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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 인근의 소도시 세리아테의 한 가톨릭 교회 본당 내부에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관들이 2열로 놓여 있다. /사진=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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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극우 정당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는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일단 위기부터 해결하고 나서 EU를 떠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유럽이 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반EU 민족주의 정서가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구제책을 마련하는 데 다시 단결할 것이라는 신호가 보이지만, 현재의 단기적 분열은 장기적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전했다. WP는 이어 열린 국경과 경제가 궁극적으로 평화와 번영을 부를 것이라는 기본 전제가 점점 더 의심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EU를 흔드는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어느 때보다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유럽의 과학수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연구 프로그램 도입을 주장했지만 EU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7일 FT에 따르면 EU의 대표 연구기구인 유럽연구이사회(ERC·European Research Council)의 마우로 페라리 이사장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페라리 이사장은 "열정을 가지고 ERC에 합류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나를 실망시켰다"고 밝혔다.

2007년 유럽 내 선진 과학자 연구 지원을 위해 설립된 ERC는 연간 20억유로 예산을 보유하고 있다. 페라리 이사장은 지난달 초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ERC 특별 프로그램 설치를 제안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약물, 새로운 백신, 새로운 진단도구를 개발하기 위한 자원과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라리 이사장은 "그러나 ERC 과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내 제안을 거부했다"며 "그 이유는 톱다운 연구 프로젝트 지원은 ERC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EU 회원국 간 의료정책 공조 부재와 응집력 있는 재정 지원 이니셔티브에 대한 반복적인 반대, 만연한 일방적인 국경 폐쇄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김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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