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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1년…대체법 미뤄지며 위험 내몰리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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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일 ‘낙태죄’ 처벌조항 헌법불합치 결정 1년

유산유도제 정식 도입도, 임신중절수술 의료인 교육도 안 된 상황

최근 코로나19로 ‘위민온웹’ 등 국외 유산유도제 수급도 막혀

여성계 “입법∙사법∙행정 무책임의 결과”


한겨레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해 9월27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28일) 맞이 임신중지 지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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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지난해 만나던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겨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친구는 폭언과 협박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는 살인마다. 너를 고소하겠다”고 연락하더니, 결국 올해 초 경찰서에 가서 ㄱ씨를 낙태죄로 고소했다. 헌법재판소(헌재)가 ‘낙태죄’ 처벌조항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이후였지만 경찰은 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고소를 접수한 뒤 ㄱ씨에게 ‘낙태죄 위반 혐의로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통보했다. ㄱ씨는 당황스런 마음에 한 여성단체에 이런 사연을 호소하며 상담을 요청해왔다.

지난해 4월11일 헌재에서 ‘낙태죄’ 처벌조항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지 곧 1년이 되지만, 국회에서 대체 법안을 미루는 사이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이 계속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국회는 올 연말까지 ‘낙태죄’ 처벌조항을 개정해야 하지만, 헌재 결정 이후 발의된 법안은 이정미 정의당 의원의 ‘임신 14주 이내 제한 없는 임신중지’ 개정안 개정안 하나뿐이고, 이마저도 20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자동 폐기된다. 보건복지부 등에서도 별다른 가이드라인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인터넷 등에는 ‘미프진(세계보건기구(WHO)가 안전성을 검증한 유산 유도약) 남은 것만이라도 살게요’, ‘임신 9주차라 너무 급해요. 도와주세요’라며 음성적인 경로로라도 약물을 구하려는 글들이 곳곳에 올라와 있다. 정부 가이드라인이 없다보니 여성들이 어느 병원에 가야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올라온다. 한국보건정책연구원이 진행한 ‘2018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만 15~44살 여성 1만명 가운데 756명이 인공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19.9%에 달한다.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노새’는 “헌재 결정 이전과 마찬가지로 임신중절 수술 병원이나 약물을 구한다는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지만 제도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민우회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미미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사태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위민온웹’과 ‘위민헬프위민’ 등 전세계 여성들에게 유산유도제를 제공해온 국외 시민단체들은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아시아 지역의 수급이 막힌 상태다.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 이후 가정 안에 자가격리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가정폭력이 늘어날 우려도 나온다. 이유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획운영위원은 “친밀한 파트너나 가족과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폭력의 위험도 커질 수 있다”며 “원치 않는 성관계나 임신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프랑스, 미국 등에선 외출제한 조처 이후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급증했다.

결국 지난 1년 동안 임신중지를 ‘불법적 상태’로 방치해온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재 결정 이후 검찰만 임신 12주 이내 임신중지에 대해 기소유예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는 우선 법이 만들어져야 제도를 구상할 수 있다는 입장만 밝히고 있다.

여성계는 “정부가 법만 기다려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문설희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집행위원장은 “정부는 임신중지를 공공의료 서비스와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 국가 의료보험에 적용할 것인지 여부를 검토하고 국외 유산유도 약물을 조사하는 등 법 개정 전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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